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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풍죽도

8. 바람과 매화

by 소금눈물 2011. 11. 11.

 

11/22/2010 08:27 pm공개조회수 0 0


 




"기별도 없이 어찌된 일이냐?"


길밝이등을 들고 앞장서는 상좌승을 따라 안 마당으로 들어가니 헌이도련님이 안방 문을 열고 마루에 나와 서서 내다보고 있었다. 몇 달에 한번씩 도련님을 보았으나 이 몇 달 사이 도련님은 완연히 장부가 되어 있었다. 키가 훌쩍 크고 마른데다 낯빛이 차가워서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서로 많은 말을 해본 것은 아니나 애기씨나 나리마님처럼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댓돌 아래에 서서 나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께서 오라버니를 데려오라십니다. 일손이 바빠 막쇠와 달재아범이 못 오고 창이를 데리고 왔지요."


 

헌이도련님은 애기씨의 행색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애기씨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에 서 있는 내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오다가 요 아래참서 넘어졌어요. 저를 잡으려다 창이까지 호되게 자빠지는 바람에・・・・・・ 저 땜에 저 아이가 단단히 혼이 났답니다."



행여라도 꾸중을 들을까봐 미리 앞서 두둔을 하여주는 애기씨를 보고 도련님이 혀를 찼다.


"말 많은 계집아이가 찬찬히 좀 다닐 것이지 밤길에 어쩌자고 그리 방정을 떨었더란 말이냐. 물색 모르는 남이 보았더라면 험한 말 나기 딱 좋은 꼴 아니냐. 쯧쯧・・・.. 시집갈 날이 코 앞인 녀석이・・・・・・"


애기씨는 오라비 말에는 대답도 없이, 잠자코 서 있는 나를 보고 화를 냈다.


"가서 손이나 씻게 물 좀 떠다주렴. 멀거니 서 있지 말고."


물을 떠다 애기씨에게 갖다 드리고 나는 우물가로 돌아왔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세수를 하는데 얼굴에 닿는 우물물이 칼날처럼 쓰라렸다. 손바닥도 무릎도 엉망이다.

나는 대야에 비친 달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바닥이 더 아프다. 마음은 아무리 아파도 피가 나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흙투성이가 된 얼굴과 다리를 씻고 나니 방에 저녁상이 차려졌다.

나물과 된장을 푼 국물에 밥을 말아 삼켰다. 애기씨도 말이 없고 나도 할 말이 없어 저녁상은 돌덩이가 얹혀진 것처럼 무거웠다.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가자. 오늘은 곤할 테니 일찍 쉬거라."


애기씨는 공양주와 함께 자겠다고 건너방으로 가고 나는 도련님과 함께 자게 되었다.

이미 밤이 깊어 도련님은 보던 책을 덮고 서안을 물렸다. 나는 이부자리를 내려 폈다.


등잔불이 꺼지고도 한참을 잠이 오지 않았다.

넘실거리던 달빛이 창호지를 열고 들어와 방안을 온통 희부윰하게 적셨다. 돌아서 눈을 감고 누워있으면서도 목덜미에 닿던 애기씨의 따뜻한 숨결과 이마를 대고 전해주던 온기가 내 등으로 어깨로 다가와 나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느냐?"


"아닙니다."


"네가 나 없는 사이 집을 잘 지켜주고 할아버지께 큰 위로가 되었다 들었다. 고맙다."


"당치않습니다."


"할아버지는 옛날 당신의 못다 한 원만을 생각하시어 평생 괴로워하며 사셨다. 당신의 죽은 아들보다, 손자인 나보다 더 애틋하고 괴로운 사람들이 있지. 그래봤자 세상이 당신을 어찌 알아줄 것이라고・・・・・・ 내 아버지는 평생 집안도 가솔도 돌아보지 않는 당신의 아버지를 원망하고 정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손자인 나에게는 그리 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역시나 할아버지는 변치 않으시더구나."


나는 숨을 멈추었다.

누구였을까. 나리마님의 회한이 되어버린 사람들. 당신의 아들도, 손자도 뒷전으로 밀고 그들 가슴에 대못을 박게 한 사람들.


"나는 아버지처럼 그리 살다 가지는 않을 것이다. 출사를 하면 이깟 기울어져가는 집안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와도 아버지와도 다르게 살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신 동안은・・・・・・ 당신의 뜻을 나는 거스르진 않겠다."


더는 말이 없었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깊어가면서 바람이 거세졌는지 돌쩌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삐걱삐걱 들렸다.


매화꽃이 다 지고 말겠구나.

애기씨는 바람소리에 무서워하지 깨지 않고 잘 주무실까.


저녁상을 물리며 불목하니가 장작을 깊이 넣는 것을 보았는데 방안은 도무지 따뜻하질 않았다. 가슴에 텅 빈 우물이 생긴 것처럼 막막하기도 하고 누군가 그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불안하고 무서워서 나는 이불을 바짝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창문을 치는 바람은 도무지 밤새 그치지를 않고 달빛은 방안을 내내 쓸며 오갔다.

새벽이 되도록 헌이 도련님은 한번도 깨지 않았다.



*그림 이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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