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의 뒤에는 수현이 보퉁이를 든 사내 종을 데리고 있다.
본격적으로 혼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헌이형님이 가례(嘉禮)를 올리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니 역혼을 치를지도 모른다.
"피가..."
"괜찮다. 스친 것 뿐이야."
당황하여 허둥대는 근적이보다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누이와 수현이 더 신경이 쓰였다.
누이가 다가왔다.
"많이 다쳤느냐?"
"별 일 아닙니다."
나는 손가락을 감추고 일어섰다.
누이의 뒤에 서 있던 수현의 눈길이 근적이에게 꽂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어찌할 줄을 모르는 근적이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녁상을 물리고 할아버지 자리끼를 가지러 갔더니 설겆이를 하고 있던 근적이네가 낮의 소동을 들었는지 미안해하였다.
무슨 대수라고 아마도 제 어미에게 말을 보태 호들갑을 떨었던 게다.
"계집아이가 자발없이 굴어... 말만한 계집이 도무지 언제나 철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손이 둔해 그런 거지 근적이 탓이 아니라네. 내 영 안 될 팔자면 대장간에 가 수철장(쇠를 만드는 이)이나 할까 하였더니 그 재주도 없는가보이."
농이라고 건넨 소리에 근적이 어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스개소리도 하십니다?"
"왜 수철장이 아니될 것이니 쇠 두드릴 떡메질이라도 배울까?"
평소에 도무지 쓸데없는 말이라곤 아니하는 이가 연달아 실없는 소리를 하니 놀라던 얼굴이 풀어졌다. 싱긋 웃는 입매가 근적이 제 어미를 닮았다 싶다.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어찌했던 도련님은 양반이시니 그런 일을 하실 일도 없겠거니와 세상에 못할 일이 대장간 수철장이지요. 계집에게 기생 무당이 못할 일이라면 사내에게 대장장이가 그 일일까요."
"고래로 대장장이가 임금님이 된 일도 있었지."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도련님이 아무리 의지가지가 없다 하여도 그래도 기와지붕 아래 사시니 바깥 세상을 몰라 그러십니다.
공조, 상의원, 군기시, 내수사, 귀후서... 대장장이 손을 가져가는 데는 많고도 많읍지요. 왼갓 관청에 쇳물을 만져 바치고 겨우 짬을 내어 민가의 칼이나 농구를 만들어 팔아 호구로 삼는다 하지만 그마저 태반은 세금으로 또 떼어갑니다. 그러니 대장장이는 장가도 가기 어렵지요. 제 입 하나도 감당 못 하게 괴로운데 어찌 일가를 만들겠습니까."
네 팔자가 아무리 기박하여도 그래도 양반네 의탁하여 먹고 사는 처지니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 탓하려 한 소리는 아니겠으나 근적네의 말이 화살이 되어 꽂혔다.
"불가에서 하루종일 두드리는 쇳가지가 제 뼈요 녹이는 쇳물이 제 살입니다. 대장장이 손을 거치지 않고는 부엌에서 쓰는 칼 한 자루도 나올 수 없고 농부가 쓰는 쟁기 하나도 없습니다. 입만 무섭습니까? 장수가 휘두르는 칼은 누가 만드는 것이며 높은 양반들이 타고 다니는 가마에 붙은 쇠쪽 하나까지 알고 보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그 천한 이들이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제 입에 들어가는 쌀 한 톨, 발에 신는 버선 한 짝 제 손으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 천한 농부와 침모와 대장장이들이 없으면... 아이구머니나!"
신세한탄을 하듯 주절주절 늘어놓던 근적이네가 화들짝 제 말에 놀라 입을 다물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을 하다보니 할 말이 아니라, 마님이라도 들었으면 큰일 날 소리다.
"염려말게. 자네 하는 소리가 그른 말이 하나 없네. 내가 세상을 몰라 철없는 말을 하였네."
"부디 잊어주십시오. 이년이 제 팔자를 모르고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수다가 늘어지느라 그랬습니다."
"근적이 누구 닮아 당찬가 하였더니."
감당 못 할 소리를 지껄였다 당황하던 근적이네가 내 말에 피식 따라 웃었다.
잠시 웃던 근적이네 얼굴이 문득 조용해졌다.
"하여튼. 그 년이 또다시 얼쩡거리면 혼구멍을 내주십시오. 우리같은 처지야 그저 조용조용히 주인댁 눈치나 보다 가늘게 살다 죽는 것이 소원일 뿐입니다. 어쨌든 윗전 눈에 띄어 좋은 것은 종년 팔자에 없습니다."
내가 윗전이랄 것은 없다.
근적이네의 한숨에 어린 속내는, 자라면서 염태를 감추지 못하는 딸을 걱정하는 소리다.
그렇지... 반빗아치 종년 팔자에 미모가 좋을 일이 뭐가 있겠으며 양반댁 사랑이나 전전하며 얻어먹는 주제에 재주가 가당키나 한 소린가.
나도 근적이네도 말을 잃었다.
부엌을 나오자 수현이 돌아가는지 마당에서 누이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학창의를 입은 수현의 얼굴이 대청마루에 달아놓은 등불보다 훤했다.
수현이 돌아보며 누이에게 뭐라고 했는지 누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은행빛 옅은 명주에 자주색으로 삼회장을 두른 저고리를 입은 누이는 그림처럼 어여뻤다.
"참 곱지요?"
어느결에 옆에 와 있었는지 근적이 중얼거렸다.
"곱다..."
"그래도 제겐 수현도련님보다는 도련님이 훨씬 더 훤칠하십니다."
무슨 소린가 하여 돌아보니 근적이수현을 보고 하는말이었다.
무심코 한 소리다.
말을 하여놓고는 또 얼굴이 붉어졌다.
내 눈길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올려다보는 근적에게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애기씨는 참 곱지요. 하지만 애기씨에게는 수현도련님이 계십니다."
"무슨 소리냐."
근적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도련님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를 짐작할 듯도 하여서요.
하지만 마음이 내 마음이라 한들 어찌 내 뜻대로만 되겠습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근적이는 입을 다물었다.
뒷곁으로 돌아가는 옆모습이 어쩐지 좀 쓸쓸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수현을 보낸 누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손은 괜찮고?"
"마음 쓰실 일 아닙니다. 애초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이의 얼굴을 대하니 나도 모르게 근적의 말이 떠올라차갑게 대꾸하고 말았다.
누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상처입은 표정이었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내 눈길에 누이의 운혜가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아도 보지 않으리라.
누이의 무엇이든,형체가 없는 목소리라도, 잡히지 않은 그림자라도 담지 않으리라.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누이를 뒤로 하고 나는돌아서 어둠속으로걸어갔다.
* 그림 신사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