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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풍죽도

6.활쏘기

by 소금눈물 2011. 11. 11.

 

11/20/2010 12:45 pm공개조회수 0 0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헌이 소식이 궁금하여 달려왔다."


애기씨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깊은 산중 암자에 있으니 천지간 답답하고 말을 나눌 사람도 없어 쓸쓸하였던지 어머니를 붙잡고 놓지를 않아 이렇게 길어졌답니다."


"작정하고 글공부하러 간 사람이, 사람이 그립다 하면 어찌하누."


"그러게나요. 헌이오라버니는 수현오라버니에 비하면 애기 같아요."


두 사람은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면서 사랑으로 들어갔다.

나리께 인사를 여쭈는 것이다.


 



"수현도련님은 도련님 벗이랍니다. 참 잘나셨지요?"


냉큼 댓돌로 올라와서 내 옆에 앉으며 근적이가 종알댔다.

두 사람이 들어간 사랑채를 힐끗 보고는 큰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귓가에 대고 소근거렸다.


"어미 말이 애기씨는 수현도련님하고 혼인할거래요. 돌아가신 나리와 일찌감치 약조가 되어있다나요."


저렇게 예쁜 애기씨와 혼인한다니 수현도련님은 참 좋겠구나・・・・・・ 나도 모르게 눈길이 저절로 사랑채로 따라갔다.


이후로도 수현도련님은 가끔 들렀다. 나리마님께 인사를 올리러 들어오면 애기씨도 사랑채로 건너왔다. 오라비를 대하듯 애기씨는 도련님에게 싹싹했고 도련님도 누이를 대하듯 눈길이 따뜻했다. 두 사람이 사랑채로 건너오면 나리 앞에서 글공부를 하던 나는 서안을 치우고 물러나왔다. 절을 하는 수현도련님을 보는 나리의 눈길은 나를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따뜻함이었다.


상한 뼈는 오래지 않아 아물었다. 얼굴에 붙어있던 피딱지도 시간이 흐르자 떨어졌다. 가슴을 묶었던 띠를 풀던 날 밤, 나는 승호형님에게 물었다.


"구선복이 누굽니까?"


내 저고리 옷고름을 매주던 승호형님의 손길이 멈칫했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이름이다."


"나리께서 한 무리에 아비와 아들을 다 죽일 뻔했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 아비도 그이들 손에 돌아가신 겁니까?"


승호형님은 손을 놓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눈길이 어두워져있었다.


"네가 아직 어리니 훗날 일러주마. 나는 뵌 적이 없어 잘 알지도 못하고."


"훗날 일러주실 것이거든 지금 아는 것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고집을 부리는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무연히 흔들리는 등잔불을 바라보던 승호형님이 입을 열었다.


"구선복은 역적중의 역적이다. 돌아가신 사도세자를 뒤주로 몬 일당 중의 한 놈이었다. 뒤주 안에 갇혀 8일간을 곡기는 커녕 물도 못 마시고 참혹하게 주려 돌아가실 때 뒤주 밖에서 술과 고기를 구워먹으며 저하를 조롱하던 놈이었지. 하늘 아래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을 그 흉악한 놈은 주상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자 제 처지가 백척간두에 달린 것을 알고 그동안의 죄를 뉘우치고 빌기는 커녕 여러 번에 걸쳐 감히 전하를 해하려고 하고 마침내는 생질과 더불어 역모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되었다.


너의 아버님이 전하의 호위무사였는데 보위에 오르시던 해, 존현각을 지키다 침탈한 무리들과 맞서 싸우다 돌아가셨다 들었다. 환관이나 궁인들도 다 적도의 한패여서 존현각은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중과부적이었으나 천만다행히 전하를 지킬 수 있었단다. 임금의 호위무사야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천명이니 어찌 애닳다할 수 있겠느냐. 허나 태중의 너를 보지도 못하고 그 젊은 목숨이・・・・・・"


그랬구나・・・・・・


"외숙부는 아비가 병이 깊었다 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깊이 원한을 남겨 네가 엇나갈까 두려워하셨나보다."


"그러면 나리마님과 저의 아비는 어찌된 인연입니까?"


"나리마님께서는 사도세자의 익위사였다. 지엄한 어명으로 사방 군졸들이 에워싸 뒤주를 지키고 익위사들의 손과 발을 다 묶었으니 어찌할 수 있었겠느냐. 목숨으로 주군을 지키지 못하였다 통곡하시고 모든 인연을 다 끊고 바깥세상과 문을 닫고 사셨다. 주상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고 그간의 사정을 아시니 여러 번 부르셔서 장용위를 맡아 달라 하시는데도 이미 나이가 많아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사하셨지. 내가 보기엔 차마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어 그러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전하께서 여러 번 거듭 청하시니 세손시절부터 함께 하던 익위사들을 가르치셨지. 아마도 그렇게 인연이 되었던 것 같다. 야뇌형님과도 그렇게 만났을 테고. 당신은 저하를 지키지 못해 천추에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생각하시는데 네 아버님이 주상전하를 지키다 그리 가셨으니 너를 보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시겠느냐. 그러니 네가 한시도 마님의 마음을 잊지 않고 성심을 다 하거라. 너를 보시기를 네 아버님 보듯 하시는 분이다. "


"예・・・・・・"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아비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은 사실이었다.


"누구보다 용맹하고 심기가 반듯하여 제자들 중 누구보다 아끼던 분이셨지. 저들의 세도가 극악하니 억울하고 비통한 심경을 차마 드러내지도 못하고 뱃속의 네게까지 해를 입힐까 두려워하여 네 어머니께서 몸을 숨기고 사셨구나. 뒤늦게 일 점 혈육을 남긴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뻐하셨던지・・・・・・"


승호형님의 목소리도 젖어들었다.

소리죽여 꺽꺽 우는 나를 당겨 끌어안고 어깨를 도닥도닥 두드려주었다.


"외롭다고도 서럽다고도 생각하지 말거라. 네 아버님을 자식보다 형제보다 아끼던 이들이 이리 많지 않더냐. 사내로 태어나서 부끄러움 없이 일생을 살고 천명을 다 했으면 그것이 자랑이고 보람인 게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비가 없다.

어미의 기억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마루 밑에 자는 강아지도 제 어미가 있고 처마 밑에 날아드는 제비새끼도 제 근본이 있으련만 부모도 형제도 없이 여기저기 의탁할 데를 찾아 떠도는 내 신세가 어찌 저 강아지와 제비새끼보다 나을 것이 있을까. 이제야 나도 아비어미가 있었으며 그 분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던가를 남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비통하고 서러워서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끝내 소리 내어 울지를 못했다. 그 와중에도 내 울음소리가 건너 방 나리마님의 잠을 어지럽힐까 두려웠고 어려서부터 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본 적이 없이 살아오다보니 무슨 말을 들어도 통곡을 하며 서러워할 줄도 몰랐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가슴을 문지르며 꺽꺽 밭은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더욱 말수가 줄었고 표정도 사라졌다.

이따금 걱정스럽게 나를 보는 승호형님을 느꼈지만 고개를 숙이며 눈길을 피해버렸다. 나리마님 앞에서도 필요한 대답만 할 뿐 나는 벙어리처럼 말을 잃어버렸다.


아이였으나 나는 한번도 아이가 되어보지 못했고 아이의 표정을 가져보지 못한 채 나는 아이를 벗어나 사내가 되어갔다. 가슴이 텅 비어 나무나 돌멩이처럼 사람의 감정을 갖지 못하면서도 세월은 나를 비껴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열일곱이 되었다.



* 그림 경운 강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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