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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풍죽도

9. 낭구도

by 소금눈물 2011. 11. 11.

 

11/23/2010 03:17 am공개조회수 0 0




불일암에서 돌아와 사랑채에 들어가니 나리마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 나이가 약관이 되었으니 이제 과거를 볼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집을 비우고 밖으로 떠도는 뜻은 내가 짐작하나 이 집안의 기둥은 너다. 나는 이미 늙어 병이 깊으니 네 누이도 너도 오래 지켜봐줄 수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급하구나."


"제가 불민하여 학문이 깊지 못하니 아직 과거를 볼만하지 않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나는 속으로 의아하였다.

승호형님말로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영특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상당한 책을 읽고 경지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불일암에서도 너덜너덜하게 겉장이 상하여 여러 번이나 새로 철한 책이 책꽂이에 가득한 것을 보았는데 어찌 감추는 것일까.

그러나 의아한 내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헌이도련님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먼 길을 운정이 데리고 네가 고생하였구나."


나리마님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애기씨께서 생길에 고생하셨지 저는 괜찮습니다."


"애기씨라니! 네가 노복이냐? 아직도 입버릇을 고치지 못하였으니 이런 한심한 녀석!"


"송구합니다."


"앞으로 다시 한 번 애기씨니 나리니 그따위 말을 입에 담는다면 내 용서치 않으리라!"


나는 허리를 굽혔다.

옆으로 돌린 헌이도련님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며칠 후에 나는 초어정으로 찾아갔다.

웬일로 일찍 퇴청하여 차를 마시던 야뇌께서 문을 열어주었다.


"심부름을 왔느냐?"


"아닙니다. 제 사사로운 일로 찾아뵈었습니다."


들던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에게 무술을 가르쳐주십시오."


"뭐라고?"


"언제까지 어르신께 의탁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저도 이제 다 컸으니 제 길을 준비하려 합니다. 아마도 제게 맞는 길은 이 길이 아닌가 합니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주먹을 쥐고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하긴 네가 그 댁에 오래 있기도 어렵겠지. 스승님이 연로하시고 헌이가 부쩍 노론사람들과 교류가 잦다 하니 그 아이 출사하면 네가 몸 붙이기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참담해졌다.

언제까지 떠돌며 은전을 바라고 살 것인가.


"재작년부터 화성에 장용영 외영이 설치되면서 별시가 자주 있으니 열심히 준비해 보거라."


나는 읍을 하고 물러났다.


그 날부터 나는 수시로 장용위 병사들의 훈련을 눈여겨보며 활쏘기와 검술을 익혔다. 이미 경지에 다다라 말을 타고 줄에 매달린 곤봉을 과녁삼아 화살을 날리는 그들 사이에서, 기본 20순을 제대로 쏘기에도 어려웠지만 이내 활시위가 손에 익으면서 그들을 따라잡게 되었다.

몇 번이나 손바닥에 허물이 벗겨지고 피딱지가 앉은 자리가 다시 굳어져 내 손은 바윗장처럼 단단해져갔다.


"활은 그 모양과 재질, 용도, 크기 세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뉜다. 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각궁인데 그 탄력성이 강해 중국 활은 조선 활을 따를 수 없다. 아직 익지 않아 네 손이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나 무과에서 궁시는 가장 기본적인 과목이다. 박두, 철전, 유엽전, 편전은 눈을 감고도 날리게 익히도록 해라."


"검중에서 네 손에 맞는 것은 무엇이더냐?"


"환도는 긴박한 상황에서 방신(防身)이나 호신을 하기에 용이하나 짧고 예리하지 못하여 접근전에서 주무기로는 쓸 수 없습니다. 허나 토유류(土柳流)의 검법으로 빠르기와 강렬한 검법으로 응용하면 제게 다른 무기보다 나을 듯 합니다."


"양 인이 왜검을 겨루어 쓰는 기예로 교전 검법이 있다. 피검(皮劍. 목검에 가죽을 입힌 검)으로 격검하여라."


그 때부터였던가.

'애기씨'와 '도련님', '나리'를 부르지 않게 된 것이.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 마음을 일으키려 할수록 상전이나 의지처가 아니라 할아버지 말씀대로 나도, 누이나 형이라 부를 수 있는 지친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일까.

그들에게 내가 무엇이든, 내게는 그들이 가족이고 마음을 잡는 사람들이었다.


땀에 절어 돌아오는 저녁, 사랑채에서 마주치는 헌이형님은 별 말이 없었다. 언제나 처럼 내게는 거리를 둔 차가운 얼굴이었다.


형님이 돌아오자 마음이 안정이 되셨는지 할아버지의 병세도 더 깊어지지는 않았다. 밤늦도록 나와 형님을 붙잡아두고 책을 읽히고 문답을 주고받았다. 문 밖으로 외출도 하지 않고 부쩍 바빠진 야뇌도 발걸음이 뜸해지시니 그게 그분의 유일한 낙처럼 보였다.


수현의 발걸음도 부쩍 잦아졌다.

그가 오면 헌이형님은 운정누이도 함께 불러 차를 마셨다. 언제나 차가운 표정으로 굳어있는 형님이 그들과 더불어 정담을 나누는 시간은 유일하게 웃음을 보이는 때이기도 했다. 키가 크고 낯빛이 흰 청수한 헌이형님과 빼어난 미남자이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다정한 수현, 두 남자 사이에서 다반을 마주한 운정누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청춘들이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었다.


초어정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른 여름햇살을 종일 받으며 뛰고 구르다보니 얼굴은 온통 시꺼멓게 그을리고 땀에 젖어 등허리가 끈적거렸다.

우물가에서 저고리 소매를 걷어부치고 씻는데 근적이 남새소쿠리를 안고 와 두레박으로 물을 펐다. 열 살 무렵부터 소꿉놀이를 하며 같이 큰 근적이. 철이 들면서 어쩐지 예전과 다르게 어색하여져 은근히 아닌 내외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근적이에게 제일 만만하고 편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살붙이처럼 가까운 누이라 하여도 엄연한 상전이니 운정누이와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어른들 사이에서 그래도 또래라고 내가 좀 친근하였던 것이다.


"통 얼굴 보기가 어려우셔요."


자배기에 물을 쏟으며 밝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남새 뿌리를 다듬는데 자꾸 칼이 엇나간다. 무딘 칼을 들고 쩔쩔 매는 걸 보다 못해 손을 내밀었다.


"숫돌에 갈아주마. 이리 내거라."


"아비가 갈아준다 하였는데??????"


칼을 내밀며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데 눈가가 초롱하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언제 이 아이가 이렇게 자란 것일까.

아니 지금까지 열 살 동갑내기 계집아이로만 보았던 것이 더 이상하다. 내가 자랐듯 이 아이도 함께 자란 것이다.

분가루 한 번 닿았을 리 만무하건만 뽀얀 목덜미와 손가락으로 콕 찌른 듯 우물이 옴폭 파인 볼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계집아이는 언제부터 여인이 되는 것일까. 물도 들이지 못한 흰 무명저고리를 입고도 보얗게 핀 얼굴이 참 곱다. 운정누이가 배꽃처럼 환하다면 근적이는 복사꽃처럼 예쁘다.


내 눈길에 근적이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얼결에 들고 있던 칼을 놓쳐버렸다.


"아얏!"


순식간에 손가락 끝에 앵두처럼 툭 하고 핏방울이 올라왔다. 숫돌에 갈아진 칼이 미끄러지며 손끝을 스친 것이다.


내 손가락을 잡아채어 근적이 제 입으로 가져가 빤 것은 순식간이었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근적의 혀가 일으킨 낯설고 뜨거운 감각이 순식간에 내 등허리로 번갯불처럼 타며 흘러갔다.


나는 숙인 근적이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얼결에 멍청해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을 빼내어 근적이를 밀쳤을 때 사랑채 중문에서 우리를 쏘아보는 운정누이를 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 그림 단원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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