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일곱이 되던 해에 승호형님은 액정서 별감이 되어 집을 떠났다.
별감이라는 것이 별로 내세울 관직은 아니나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봉행하며 늘 가까이 있으니 위세를 부리려 치면 육판서가 부럽잖은 자리지 않느냐고 승호형님은 껄껄 웃었다.
"이제 너도 다 컸고 나까지 더 스승님 댁에 의탁하여 짐이 될 수는 없다. 나도 가솔도 생겼고 머지않아 헌이도 돌아올 테니 네가 나대신 스승님을 잘 모셔라. 별당의 아씨마님과 운정이도 잘 돌보고. 내가 틈틈이 들러보기는 하겠다만 곤란한 일이 생기면 지체 말고 야뇌형님댁에 연통을 보내거라."
"예."
승호형님이 떠나신 집은 더욱 적적하여졌다.
수시로 초어정에서 고기며 쌀을 보내 돌보아주었고 나리마님도 늦은 밤까지 나를 불러 서책을 정리하게 하셨다. 부쩍 눈이 침침해지면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나리마님이 불러주는 글자를 옮겨 적어 책으로 엮을 지경이 되면 초어정에 갖다 주었다. 야뇌형님은 무술을 하는 장정들을 모아 책의 내용대로 시연해보게 하였고 몸짓이며 검과 창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다시 자세를 고치고 이를 화공이 옮겨 그려 교본으로 엮는 듯 했다. 화공 앞에서 이리저리 창과 검을 바꾸어 대련을 하는 장정들의 몸짓을 보며 나도 조금씩 따라하게 되었다. 대련의 상대가 없는 수벽은 안 되었지만 혼자서 곧잘 따라하다 보니 도나 검의 쓰임새며 표창던지기 정도는 제법 그럴싸해졌다.
"눈썰미가 뛰어나고 몸이 날래니 천생 무골이로다. 가르치지 않아도 저 혼자 배우고 익혀 어지간한 병졸보다는 훨씬 낫구나."
어느 날 담장 아래서 혼자 창을 휘두르는 것을 본 야뇌형님이 함께 온 장용위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구선복의 일가 어느 놈이 열 살 꼬마 녀석에게 혼찌검이 났다 하더니 저 아이였군요."
"제법 심지가 곧고 속이 깊으나 눈이 너무 어두워. 저런 녀석은 제 한이 깊어서 작은 일에는 옳게 쓰이나 큰일을 하기에는 자칫 뜻을 그르칠 수도 있다."
"허나 어찌 제대로 길러보지도 않으시고・・・・・・"
"사연이 깊은 아이니 함부로 끌어들여 저 아이 인생까지 어지럽힐 수 없다. 제 아비도 저 아이까지 그 길을 가게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 보이려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리마님이 쓰는 글이 병법서라는 걸 알고 나니 더더욱 눈길이 갔고 품새나 병기의 살상거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혼자 연습을 해보는 것이었다. 누구의 가르침이 없으니 더디고 서툴었지만 세월이 가고 몸에 익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들의 눈길을 뺏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리마님이 사랑으로 나를 부르셨다.
겨울을 지나며 해소기침이 끊이질 않더니 밤에는 피를 토할 지경에 이르렀다. 외삼촌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나는 나리마님의 열에 들떠 붉어진 낯빛이 두렵고 떨렸다.
들어가 보니 애기씨가 나들이채비를 하고 옆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고개를 살짝 돌리며 조금 비켜 앉는 시늉을 하였다.
"헌이가 초시를 치를 때가 넘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구나. 그 아이가 출사하여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죽으려 했는데・・・・・・"
"아직 기력이 창창하시고 강건하시니 틀림없이 보실 것이옵니다."
나리마님이 도리질을 하다 갑자기 연달에 가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얼른 곁에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기대어 드렸다.
"운정이와 불일암에 다녀오거라.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내가 좀 이를 말이 있다고 하여라."
"예."
"창아・・・・・・”
나는 고개를 들어 나리마님을 바라보았다.
"너는 내 손자다. 혹여 내가 없더라도 너는 이 집 식구다. 헌이와 운정이를 친 동기간처럼 의지하고 살거라."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는 나리마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할애비라 부르거라."
"소인이 어찌 감히・・・・・・"
"내가 너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네가 나를 상전으로 생각하느냐?"
"거두어주신 은혜만으로도 태산 같사온데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지라・・・・・・"
나리마님은 애기씨를 돌아보았다.
"운정아. 오늘부터 창이는 네 동생이다. 너를 누이처럼 따르고 보살필 것이니 행여라도 아랫것들이 함부로 하지 않게 네가 단단히 단속을 하거라."
"염려마세요 할아버지."
애기씨가 환하게 웃었다.
"봄 농사 준비로 막쇠도 달재아범도 바깥을 나갈 수가 없다. 창이가 너보다 두 살은 어리지만 변변찮은 놈들보다야 훨씬 나을 터이니 너와 같이 다녀와도 될 것 같다. 오래 머물지 말고 오라비와 함께 서둘러 오거라."
"예."
불일암은 꼬박 하루길이다. 서둘러 가도 밤늦게야 도착할 것이다.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애기씨를 모시고 가자면 길이 더딜 수밖에 없고 밤길은 더더욱 어렵다. 서둘러야 했다.
급히 아침상을 물리고 나니 애기씨는 벌써 마루 아래 기다리고 서 있었다.
사랑에 들러 다시 인사를 올리고 길을 나섰다.
한 길에 묶이고도 나는 별 말이 없었다.
한가한 나들이가 아닌 걸 알면서도 오랜만에 밖에 나온 애기씨는 한껏 들떠 있었다.
"어머나 교리댁 매화가 다 시들었구나. 수현오라버니가 일전에 매화가 곱게 피었다고 할아버지께 몇 그루 보내겠다 하였는데 바쁘신가 잊었나보다. 그새 꽃이 다 져버렸네."
높은 담장을 지나면서 담장 밖으로 기운 홍매화 가지를 보고 탄식을 하더니
"저것 좀 보아. 벌써 개울에 버들강아지가 돋지 않니? 창아 어쩌면 저렇게 예쁠까?"
내 손을 잡고 끌었다.
나는 불에 달군 것처럼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져 어찌할 줄을 몰랐다.
"예 애기씨."
슬그머니 손을 빼는데 개울가에 몸을 기울이고 보던 애기씨가 나를 휙 돌아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할아버지 말씀 못 들었니? 너는 이제 나를 그리 부르지 마라. 누이라 하지 않으면 내 할아버지께 일러 경을 치게 할 테다."
나는 더욱 더 어쩔 줄을 몰라 눈길을 피하는데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혹시라도 당신 안 계실 때에 드나드는 이들이 너를 업수히 여길까 걱정하시는 말씀이니 너도 그리 하거라. 어머니나 나도 너를 막쇠나 달재아범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잖니. 오라버니가 안 계시고 승호오라버니까지 떠나셨으니 네가 얼마나 우리에게 든든한 의지인 줄을 모르고..."
"예..."
"가자. 도무지 무슨 공부를 그리 대단하게 한다고 도무지 집에 들르기를 그리 어려워하니 내 오라버니를 보면 아주 단단히 꼬집어줄 테야."
까르르 웃는 애기씨 웃음이 개울가 얼음장을 깨치고 나오던 노란 복수초보다 더 환해보였다.
불암산 기슭에 들었을 때는 저녁 해가 다 기울어 있었다.
오면서 내내 종알종알 수다를 떨며 따라오던 애기씨도 해가 지면서 지치는 기색을 눈에 띄게 감추지 못했다. 캄캄한 밤길은 돌부리가 많아 애기씨는 자꾸 쳐지고 주춤거렸다.
호롱을 들고 앞장서 걷던 나도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늦추고 애기씨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옆에 이르러 발걸음을 떼려고 하면 가쁘게 몰아쉬는 애기씨의 숨소리가 내 뒷덜미를 잡아채고 덩달아 가슴이 정신없이 벌렁거렸다. 아마도 낯빛도 애기씨가 입고 있는 주홍색 치맛자락보다 더 붉어졌을 것이다. 등을 돌리고 있어 내 얼굴을 애기씨가 보지 않음을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멀리서 달이 떠올랐다.
이른 봄밤의 달빛은 이내 희부연 안개처럼 계곡을 가득 채우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계곡 아래 물소리까지 귓가로 끌어와 흐르게 하였다. 이 산길이 다 끝나면 암자의 불이문이 보일 것이다. 거의 다 온 것이다.
나는 애기씨가 이제 고생을 다 하였다 안심이 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섭섭하여졌다.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저자에 심부름을 하며 근적이와 다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초어정에 쌀과 고기를 얻어오느라 근적이네와 다녀본 것도 역시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렇게 가슴이 뛰고 어지러운 걸까. 산길이라서였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숨이 가쁘고 자꾸만 손에 땀이 흘렀다. 물소리가 폭포처럼 귓가를 울리고 먼데서 우는 산짐승의 소리도 내 마음을 책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돌아가는 길에는 헌이도련님이 함께할 것이다. 다행이다. 늦은 밤길에 아씨가 다칠까봐 마음을 쓸 일도 없으니. 그러면서도 어쩐지 자꾸 걸음이 더뎌지고 불이문이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 식경은 더 남았을까. 아니다. 애기씨가 내내 한눈을 팔며 왔으니 아마도 이 밤을 다 가야할 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되면 나리마님께 꾸중을 들을 터인데・・・・・・
갈팡질팡 마음 갈 길을 모르고 헤매면서 구부러진 소나무 둥치를 안고 돌 때였다.
"아얏!"
뒤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나는 후다닥 돌아보다 삭정이 가지에 미끄러져 주르르 굴러버렸다. 호롱은 내팽개쳐지면서 박살이 나버렸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길이 어두워 미끄러졌나봐・・・・・・"
달빛에 손바닥을 내밀고 찡그린 애기씨의 얼굴이 들어왔다.
흙이 묻어 엉망이 된 손바닥을 정신없이 부여안고 흙을 털어주는데 조그맣게 다시 비명을 질렀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까졌나보다. 쓰라려."
호롱불이 꺼져 손바닥은 자세히 보지 않았다. 옷고름을 들어 손바닥을 닦고 보니 피가 묻어났다.
"그러니까 가까이 붙어 있어야지. 호롱불을 들고 그렇게 멀찌감치 가면 내가 앞이 어찌 보이니?"
"송구합니다."
"고약한 녀석!"
피가 멈추지 않는 듯 했다. 무릎 어디도 다쳤는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애기씨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윗저고리를 벗었다. 무명 속적삼을 벗어 가늘게 찢어 애기씨의 손을 친친 동여매주었다. 아씨는 잠자코 내 손에 손바닥을 맡긴 채 보고 있었다.
무릎까지 다쳐 일어서지도 못하니 어찌한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애기씨를 바라보다 등을 내밀었다.
"업히십시오. 밤길이라 아무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업히긴 어떻게・・・・・・"
"이 산길만 끝나면 불일암입니다. 달빛이 밝으니 호롱이 없어도 제가 조심해서 가겠습니다."
"아까 너도 미끄러졌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보이고 앉았다.
잠시 망설이던 애기씨가 등에 업혔다. 무언가・・・ 덜컹하고 가슴 쪽으로 확 밀려들었다. 애기씨의 따뜻한 몸이 등에 닿으면서 애기씨의 팔이 내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너는 나보다 어린데도 언제나 오라버니처럼 든든하니. 너의 성품이 워낙 진중해서 그런 걸까. 초어정 사람들도 어린 너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근적이가 그러더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근적이와 애기씨가 내 얘길 했다는 것만으로도 귓가가 화끈거렸다.
종알종알 무어라 소근대던 애기씨가 이윽고 조용해졌다. 피로가 풀리면서 잠이 들었나보다. 좀 더 무거워진 애기씨의 몸이 힘들다는 생각보다 등에 기댄 몸이 따뜻해져서 좋았다. 내 등에 고개를 묻고 가늘게 쉬는 숨소리가 사뭇 적막한 산길의 달밤을 가만가만 열었다 닫곤 했다.
이 길이 십 리만큼, 아니 이십 리만큼 아득아득 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울며 따라오던 밤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음을 흔들던 개울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애기씨의 숨소리만 목덜미에 감겨 내 목을 조였다.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에 이르면서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일암이다.
다 왔다고 애기씨를 깨우려다 나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일주문까지 한참인데 둥근 달이 휘영청 떠올라 좁은 길이 흰 천을 늘어뜨려 놓은 것처럼 환하게 눈앞에 드러났다. 온통 뿌옇게 쏟아지는 희디 흰 달빛 아래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만 같은 오래된 매화나무들. 산 아래는 벌써 다 지고 있었지만 깊은 산중이어서 늦도록 남아있던 매화꽃이 교교히 쏟아지는 부신 달빛에 온통 꽃 사태를 이루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말을 잃고 멍청히 서서 달빛에 쏟아져 날리는 꽃 그림자를 보노라니 어디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꽃가지를 흔들었다. 겨우 잡고 있던 가지를 놓친 활짝 핀 꽃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나는 달빛에, 꽃빛에 현기증이 나서 비틀하였다.
"참으로 곱구나. 이런 달밤을 나는 처음 본 것 같아..."
깨어있었나 보다.
내 어깨를 양 손으로 꼭 잡고 이마를 등에 대인 채 애기씨가 속삭였다.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무언가 뿌리도 없이 아프고 서러워서 자꾸 울컥하였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너와 함께 걸어온 이 산길을. 이 밤을."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저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애기씨를 업고 걸어온 이 밤을, 나도 역시 평생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입을 열면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울음일지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할 수 없던 내 안의 수많은 말들이 울음이 되어 쏟아져 나와 저 꽃 사태 속에 묻혀버릴 것 같아 나는 안간힘을 다해 입술을 깨물었다.
불이문에 이르러 애기씨가 등에서 내렸다. 내 등은 축축히 젖어 있었다. 찬바람을 맞자 젖은 등이 한기가 들어 후르르 떨렸다.
문을 두드리자 상좌승이 등불을 들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애기씨는 나를 돌아보았다. 부옇게 떠오른 달빛 아래서 애기씨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문득 이마에 애기씨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이마에 떨어진 꽃잎을 가만히 떼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창아・・・・・・"
"예・・・・・・"
"오래 오래・・・・・・ 우리와 같이 살자・・・・・・"
애기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 낮고 아득하여 나는 내 귀로 들은 것이 믿기지 않았다. 무언가 나를 보고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벌리던 애기씨가, 문득 눈물에 젖은 나를 보고 우뚝 서버렸다. 애기씨의 눈가도 젖어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애기씨가 내 앞으로 한 발 다가왔을 때, 문이 열리면서 불빛이 와락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어둠 속으로 주춤 물러섰다.
*그림 한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