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이 옳게 든 것은 아침나절도 한참을 지나서였다.
아자문(亞字門)살을 넘어 들어온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방안을 흘렀다.
중추절을 보내느라 새로 바른 새하얀 창호지가 햇살을 담아 눈이 부셔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기운이 좀 나느냐?"
"예"
"일어나려 애쓰지 말거라. 갈비뼈가 부러졌단다. 당분간 꼼짝도 하지 말고 쉬어라."
승호형님이 죽을 떠주었다. 누워서 넘기기가 불편했지만 가슴뼈가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흰 띠가 친친 동여져 있었다.
이마도 지끈지끈 아픈 것을 보니 나동그라지면서 어디를 되게 다친 모양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를 이렇게 모질게 때리다니 독한 놈이로구나. 그래 어떤 놈인지 알아보았느냐?"
혀를 끌끌 차면서 나리마님이 말씀하셨다. 이마에 내 천(川)자가 깊이 파였다.
"작년에 능지처사된 구선복의 일가붙이라 합니다. 성정이 포악하고 모진데다 평소에도 행패가 대단하여 원성이 자자하다 합니다."
나리마님의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일가를 몰살해도 시원찮을 것을 잔뿌리가 남아서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저러고 사는 모양이구나. 하마터면 아비와 아들을 한 무리에게 죽일 뻔 하지 않았느냐."
승호형님은 아무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밖에서 할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오냐."
나리마님은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애기씨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픈 것도 몸에 익으니 견딜만해졌다.
오후부터는 승호형의 부축을 받아 대청마루에 나가 마루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른 아침에 근적아비 막쇠가 물을 뿌리고 쓸어놓은 사랑채 마당에 빨간 감나무 잎이 꽃잎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날따라 드나드는 손님도 없어 집안은 조용했다. 나리마님은 얕은 낮잠을 주무시고 있었다.
나는 중문 옆 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장 아래 쑥부쟁이가 소담하게 피었는데 담장 벽을 따라 울긋불긋 물든 담쟁이가 올라가고 있었다. 담장 지붕위로 참새 두 마리가 푸드덕 날아왔다가 누군가 중문을 여는 소리에 후다닥 날아가버렸다.
키가 나만 할까. 아니면 조금 더 클까.
노랑저고리에 다홍빛 치마를 입은 소녀가 반쯤 닫힌 중문을 삐걱 열고 사랑채 마당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뛰어오는 참이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데 발갛게 단 얼굴에 눈이 까만 머루알처럼 반짝거렸다. 근적이와 재미난 놀이라도 하고 있었나보다 .뒤따라 들어온 근적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호기심에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다 입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이 아이가 창이로구나?"
"예, 애기씨. 어제 저자에서 구선복이네 일가붙이에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덤비다 뼈가 부러졌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나이도 어린데 너 정말 굉장하다. 야뇌삼촌네 아저씨들보다 더 용감하구나."
나는 얼굴이 벌개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쌀가루보다 더 하얀 낯빛에 미쳐 숨을 고르지 못해 볼을 발갛게 물들인 애기씨는 중문 옆 쑥부쟁이보다 더 예뻐 보였다. 대답을 못하고 멀거니 넋을 놓고 바라보는 내 꼴에 근적이가 또 까르르 웃었다. 나는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뭐가 그렇게 재미난 것이냐? 나도 같이 웃자."
두 소녀의 뒤에서 불쑥 사내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명주로 지은 남색 전복을 입은 도령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준수한 용모와 단정한 몸가짐이 귀한 댁 도련님이 분명해보였다. 짙은 눈썹에 혈색이 좋고 깨끗한 얼굴은 사내인 나도 입이 벌어질 만큼 잘난 용모였다.
그때까지 우뚝 서서 나를 보고 있던 애기씨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 도령을 보고 환히 웃었다.
"수현오라버니!"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흰 이를 드러내고 기쁨에 겨워 탄성처럼 들리는 반가움이었다. 애기씨의 얼굴은 한꺼번에 꽃봉지를 열고 피어나는 모란꽃처럼 환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소녀와 제일 준수한 소년이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아픈 것도 잊고 얼이 빠져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을날의 따스한 햇살이 온통 사랑채마당으로 달려 내려온 것만 같았다.
*그림 이경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