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직을 마치고 군 막사로 돌아왔다.
먼저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있던 동보가 내 얼굴을 살피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남들은 다 군장을 다 지고 밤새 훈련을 하느라 죽을 지경이었는데 자네 혼자만 꽃밭을 거닐다 온 듯 하이."
"예?"
"정분난 계집과 나들이라도 다녀온 듯 낯빛이 붉으니 하는 소리인 게야."
"아니 우리 샌님이 간밤에 뭔 짓을 하다 왔다고? "
문이 벌컥 열리더니 군모를 손에 쥐고 상투가 다 흐트러진 기형이 우당탕 들어왔다.
"쯧쯧・・・・・・ 그저 춘사(春事)만 귀에 쏙쏙 박히지. 자네가 전술수업을 그리 열심히 들었으면 병방한테 걷어차일 일도 없었을 테구만."
"전술이 따로 있을 게 뭐야 백날 가야 고래적 창검술얘기. 노론들이 은밀히 키우는 사병들은 다 총포를 갖고 있다는데 관운장 청룡언월도면 뭘 하나 총포 한 자루면 끝날 것을."
"저런저런"
"그나저나 뭔 소리야? 임금께서 친림하시는 군사훈련에 저 자식 혼자 춘당루 정인에게 놀러라도 갔더란 말이냐? 에라 의리 없는 놈. 저만 아는 놈. 부러운 놈!"
내 어깨를 툭 치는데 나도 짐짓 휘청하는 척을 했다.
"아이고 밤새 구름 위를 나느라 저도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이놈이 진짜"
내 말에 동보와 기형이 우르르 달려들어 냅다 나를 엎어놓고 두들겼다.
뒤엉켜 싸우다 껄껄 웃음이 났다.
땀과 피로에 절은 몸에서 냄새가 났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미친놈들. 밤새 진을 다 빼고도 기운이 뻗치느냐?"
"목구멍에 기름칠을 하고 총포를 들고 으스대는 놈들은 아무도 이 기분을 모를 것이다."
"적당히 침통이나 뒤적거리고 살면 신수 편할 것인데 왜 이 길로 가느냐고 아버지가 그리 말리더니・・・・・・"
"안 가길 잘 했지?"
동보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동보형님은 아버님께서 잘 보신 겁니다. 여기서도 창검술이나 궁술보다는 의술로 더 쓸모 있는 분 아닙니까?'
"이 자식이 정말!"
"우리 샌님이 요즘 입이 터졌구나."
내지르는 동보의 주먹에 자기 주먹까지 보태며 기형이 껄껄 웃었다.
동보의 주먹은 피했는데 방심하고 있다 기형의 주먹까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았다. 훈련에 여문 주먹은 돌처럼 단단하여 머리가 어찔하였다.
"권세가 뭔지, 노론 소론이 뭔지 정말 모르겠다."
씁쓸한 동보의 말투에 발길질을 주고받던 기형과 내가 굳었다.
"무슨 소리야?"
"운도 없지. 나도 너희들처럼 차라리 성벽이나 지키고 훈련장이나 뛰면 좋았을 것을. 그 알량한 침통을 못 벗어나고 노론 영수들을 모셔야 했다. 어명이라 갑옷은 갖춰 입었는데 제 전통(箭桶)도 못 지고 우리에게 지라 하더라. 밤새 어찌나 헛소리들을 하는지 속만 시끄러워서 혼이 났다."
나는 문득 그 자리에 있어야 했을 것은 동보가 아니라 나여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이들은 무슨 말들을 합디까?"
"화성이든 장용영이든 그저 여기 모든 것이 마뜩찮은 모양이더라. 전하 앞에서야 워낙 강경하시니 한마디 대꾸도 못하지만 저희들끼리 모인 곳에서는 아주 분기가 탱천하더군."
"하늘을 찌르는 그 권세가 사라질까 그게 걱정인 거지. 조만간 이곳으로 천도를 한다니 하루아침에 한양에 누대로 쌓아온 재물과 권력을 따라 옮기기가 쉽겠느냐. 이곳은 온전히 왕도가 될 것이니 지금까지처럼 저희들 뜻대로 좌지우지는 아니 될 것이고. 맘에 안 들것이다."
기형이 쯧쯧 혀를 찼다.
"우리야 나라에서 시키니 이리 목숨 바쳐 수만의 병사들이 성 하나를 둘러싸고 훈련이다 뭐다 고생을 하지만 정작 고생은 성역을 하는 백성 아니겠느냐? 그새 삼남과 경기지역에 흉년이 들어 난리도 아니었단다. 서북지역 수령들도 양곡이 떨어졌다고 장계가 수도 없이 올라온다는데 임금이 헛된 데에 이리 물 쓰듯 돈을 쓰며 나라살림을 탕진하고 전쟁 놀음이나 하며 보낸다고 하더군."
"이런 쳐죽일 놈들! 제 놈들 곳간에 쌓인 팔도의 온갖 재물이며 사사로이 갈취한 둔전만 내놓아도 삼 년 흉년은 걱정이 없겠다."
"단순한 놈아. 저들이라 무조건 역심을 내어 그러는 것이 아니다. 들어보면 저들도 다 나름대로 백성을 생각하고 사직을 걱정하는 조신들이다. 나라방비를 위해 성을 쌓고 튼튼한 군대를 만드는 것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나라의 근간은 백성이다. 백성이 주리면 원망이 생기고 그 원망을 옳게 다스리지 못하면 그 나라는 튼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은 올해도 내년에도 쌓을 수가 있고 훈련은 잠시 쉴 수 있지만 , 백성들을 하루 굶기고 이틀 굶기어 언제까지 참게 할 수 있겠느냐? 백성들은 누가 힘을 가졌는지, 누가 힘을 막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리 가다보면 종내는 모든 원망은 임금 혼자만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도성에서부터 화성에 닿도록 길 가에 나온 백성들은 모두 다 만세를 부르고 다투어 환호하였습니다. 신풍루 앞에 쌀과 소금을 받으러 나온 백성이 수천을 헤아렸고 화성공역만 해도 한나절 품삯까지 일일이 다 계산을 하여 나누어 주었다니 옛부터 없는 일이라 모두 전하께 감읍하였다 합니다."
"백성의 민심만큼 간사하고 믿을 것이 없는 것이 없다. 저들은 한 줌의 곡식에도 엎드려 조아리지만 그 곡식이 떨어지면 받은 것보다 받지 못하는 것에 분기를 내어 원망하기 마련이다. 성심을 천하가 다 알리라 생각하지 마라. 나는 배움이 짧고 돌아가는 세상 이치도 다 알지 못하지만 융릉을 아끼는 전하의 성심도 감히 짐작은 되지만 어쩌면 사사로운 임금의 원한 때문에 이 많은 공역이 치러지는 것이 아닐까 심란하기도 하다."
"・・・・・・"
"전하께서 지금은 워낙 강건하시고 백성의 신임이 절대적이니 저들도 다른 말을 감히 공공연히 할 수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뜻한 바대로 일이 마무리 지어지지 않을 때면 이 것이 혹시라도 발목을 잡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하는 소리다."
"그럴 일이 없으면 되지. 그러자고 우리가 이리 죽어라 뜀박질을 하고 칼질을 하는 거 아니냐?"
가라앉은 분위기를 애써 추켜세우며 기형이 씩 웃었다.
"하긴・・・・・・ 내가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밤새 저들의 원망을 듣다보니 혼자 머리 속이 시끄러워진 게야"
"그런데・・・・・・ 누가 주로 그런 소리를 하더이까?"
"뭐 말이야 높은 이들이 주로 떠들고 수종하는 젊은 패거리야 그저 주억거리는 정도지. 헌데 몇 눈에 띄는 이가 있긴 하더라."
"누군데요?"
"야 이놈아 저기 앉은 삼정승 육판서도 하나도 알지 못할 놈이 네가 누구라고 하면 척하니 알아들을 것이냐?"
쥐어박는 기형의 목소리 사이로 동보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장수현이라 하더군."
"!"
"용모가 훤칠하고 서글서글하니 눈에 띄는 용색인데다 부리는 노복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서 인품이 제법 괜찮구나 싶어 눈에 들어오더라. 헌데 그 대단한 영감들이 모여 앉은 중에도 제 할 말을 하고 논리도 반듯한 것이 한다하는 어느 가문에서라도 탐낼 만한 인재겠다 싶더구나. 아는 자더냐?"
"좀・・・・・・"
"헌데 내가 보기는・・・・・・"
"뭐야 또?"
"그 자보다 그 자와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이가 예사로이 보이지 않더구나. 말수가 적고 나서는 일이 없지만 좌의정의 수족처럼 보였다. 관직은 아직 당하관을 못 벗어난 것 같은데 어찌 그런 자가 나는 새도 못 떨어뜨린다는 실세 중의 실세 좌의정의 수족이란 말이더냐."
헌이로구나!
나는 나지막히 부르짖었다.
*그림 <안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