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새벽 먼동이 터오를 무렵에야 비로소 그쳤다. 비가 그치면서 날씨가 추워졌다. 막사에서 이른 아침밥을 먹고 나오다 전하의 행렬을 만났다. 간소한 미복에 갑옷을 덧입은 전하의 뒤에 병판과 도승지, 그리고 내관 두엇이 서 있었다. "창이 아니냐?" 미천한 이름을 기억해주시는 것이 황감하여 나는 즉시 부복하였다. "그래. 이승필이 너를 거둔다 하였지. 그릇이 그만하고 닦아줄 이가 또한 그만하니 자못 기대가 되는구나." "황공하옵니다." "언제 다시 한 번 사대(射臺)에 같이 서보자꾸나. 그새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 다오."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는 어수에 나는 바짝 얼어버렸다. 전하의 뒤를 따라가는 병판의 눈빛이 귓가로 스치면서 등허리가 서늘하다 느낀 것은 과민해서였을까. 날은 추웠다. 오전에 능침에 다다라 전배(展拜 궁궐, 종묘, 문묘, 능침 따위에 참배함)하고 오후와 야간에 두 차례 군사훈련을 하였다. 장용영 내사와 외사가 거느린 마군과 보군, 훈련대장이 거느린 마군 400여명이 함께 따라갔다. 장대한 행렬이었다. 비단옷을 떨쳐입은 문신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나와 동보가 전하의 지근거리에서 호위를 하고 기형은 척후복병으로 배치되었다. 헌은 나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그를 찾지 않았다. 현륭원 능침에 이르러 전배하시던 전하께서 격동하여 큰 소리로 울음을 쏟아내니 좌우 각신과 호종하던 군사들이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봉분을 손으로 쓰다듬고 가슴을 치며 애곡하다 손톱에서 피가 흐르고 급기야 혼절하셨다. "전하!" 배종하던 영의정이 대경실색하여 비명을 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전하를 업고 뛰었다. 능침 아래 기다리던 어의가 얼굴이 하얗게 질러 뛰어나왔다. 막사 안에 급히 모시고 어수를 주무르고 급히 침을 놓으니 잠시 후에 정신이 드신 듯 눈을 뜨셨다. "신들이 놀라고 망극하여 감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전하의 효심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나 과도히 애통하시어 어체를 상하시면 그 또한 불효임을 어찌 모르십니까." 눈물에 젖은 노신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노심초사 기다리던 이들이 모두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황망한 중에 숨을 쉬지 못하고 막사안의 동정을 살피던 나도 전하께 의식을 회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등허리에선 진땀이 흐르고 옥다쥔 주먹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약대접이 급히 들어갔다. 잠시 후에 나온 도승지가 어지를 알렸다. "혹시라도 모후께서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실까 두려우니 경망스러운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라."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엇보다 표정이 어두운 것은 노론 대신들이었다. 효심이 남다른 전하께서 그 일을 절대 잊지 않으시고 이렇게 한이 깊으니 불안하고 두려워함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장용영의 기세도 그들이 짐작한 것보다 훨씬 장대하여 마음이 불편한데다 오며가며 행려에서 만나는 백성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전하의 성덕과 효성을 칭송하니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전배가 끝나고 다시 거둥은 행궁을 향하였다. 중간에 작은 소란이 있어 좌마(임금이 탄 말)가 멈추고 긴장하였다. 격쟁이었다. 근처 고을 수령에게 부당하게 소를 뺏긴 백성이 징을 치며 나와 억울한 일을 호소하였다. 전하께서 직접 그 백성을 불러 저간의 사정을 들으시고 배종한 부사를 불러 일을 바로 처리하라 하셨다. 이런 상언과 격쟁은 능행길에는 부지기수로 있었다. 글을 쓸 줄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하소연할 길이 없던 백성들은 직접 임금께 나아가 호소하고 상께서 그 때마다 적극 들어주시니 행렬이 이르는 고을 마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행렬이 더딜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위험도 커졌다. 척후복병 뿐 아니라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는 호위무장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예(禮)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무작정 좌마를 가로막고 나설 때는 진땀이 났다. "함부로 가로막고 저들을 핍박하지 말라. 내 백성이다. 저들이 지금 나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지 못한다면 어디서 저들의 말을 들어주겠느냐. 행렬이 더뎌지는 것을 두려워 말라." 지나는 길목마다 백성의 환호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전하를 안전하게 모셔야 하는 우리에게는 더욱 난감한 윤음이었다. 행궁에 도착한 것은 해가 기울어서였다. 저녁을 먹자마자 야조(야간훈련) 준비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전하께서 습조(훈련)에 친림하실 때에는 대신 이하의 신하들이 무기와 군복을 모두 갖추고 대기하여야 한다. 대신들과 임금의 최측근에서 칼을 차고 호위하는 최고 경호 책임자인 별운검 모두에게 갑주를 갖추고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에 무구를 갖추고 섰을 때는 밤이 깊었다. 횃불을 든 군병들이 성을 에워싸고 성 안의 마을 집집마다 등이 켜지니 멀리 산 아래 보이는 마을이 별빛바다처럼 반짝거렸다. 먼 불빛을 바라보며 어둠속을 응시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는 내게 갑주를 입은 전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진 사도세자의 능침 <융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