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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풍죽도

22. 한정품국도

by 소금눈물 2011. 11. 11.

 

08/23/2011 03:07 am공개조회수 0 0

 


 

금갑(金甲)을 입은 전하와 영상인 체재공 뒤로 이승필이 보필하였다.


횃불 아래 일렁이는 용안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서장대 아래로 이어지는 횃불의 긴 선과 함성에 성심이 격동하신 듯 하였다.


"오랜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는구나.

아직 도읍이 갖춰지지 않아 협소하고 미편하여 보여도 이제 곧 이삼 년 후에 성곽이 제대로 갖춰지면 짐이 왜 그리 화성에 뜻을 두고 전력을 다하였는지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용이 날아오르고 봉황이 춤을 추는 명당이니 이 나라의 사직이 참으로 든든하여지며 전하의 성덕이 칭송받을 것입니다."


"단지 길지일 뿐 아니라 이곳은 삼남의 육로가 뻗는 길이고 군사적으로는 한양을 지키는 길목이니 남방의 요새지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양의 외곽방어체제가 동서북으로 치우쳐 남쪽의 방비가 허술한 점이 있었다. 국방은 사직의 기초이니 천 번을 강조하여도 어찌 과하다 하겠느냐.


이제부터 명실공히 왕도를 세울 것이다. 한양 아래 그 백리 권을 천자의 수도로 비견되게 할 것이다."


"행궁의 각 전각과 통행문들의 이름을 보고 감히 짐작하였나이다."


"이 도읍에 사는 백성들은 요역과 세금을 면제하고 상인들에게도 혜택을 주어 도읍을 키울 것이다. 그러니 집집마다 부요하고 사람마다 화락하여 진실로 내 아버지의 꿈과 내 꿈이 함께 이루어지는 터전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참으로 멀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의 눈길 따라 아득히 흘러가는 영상의 목소리가 떨렸다.


"창아・・・・・・"


전하께서 뒤돌아 나를 찾으셨다.


"너를 보니 네 아비가 내 옆에 서 있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죽고 다쳤으니 그들의 목숨을 빚어 내가 있구나."


"주군을 위해 기꺼이 순명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전하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셨다.


"창아. 네 아비가 나를 지켜주었듯, 너도 내 아들을 그리 지켜주겠느냐?"


"신의 몸이 부서지고 넋이 사라져도 기필코 전하와 저하를 섬기겠사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너에게 목숨을 요구하나 너를 위해 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부귀와 영화도 네게 주지 않을 것이다. 뒷배를 보아주는 일도 없으니 너는 네가 수고하여 승급을 할 것이다. 따로이 너를 염려하고 사랑한다면 저들이 오히려 너를 핍박하고 해하려 들 것이나・・・・・・ 그렇지 않다 하여도 나는 너를 아껴 옆에 두고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나를 위해, 내 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 한다."


"지당하옵신 말씀에 어찌 일 점이라도 다른 마음이 있으리까."


전하는 내 허리에 꽂힌 환도를 뽑았다.

일렁이는 횃불에 담긴 칼날이 부르르 떨었다.


"왕이란 참으로 서글프고 외로운 자리구나. 원(怨)도 잊고 한(恨)도 접어두고 사직을 위해 저희를 받아들이자 하였으나 저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미움의 뿌리도 깊고 깊으니 언제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내가 죽고 저들이 끝내 용상을 잡아야 이 싸움이 끝날까."


"전하・・・・・・"


"누구나 죽는 것을 두려워 떨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화성 천도가 눈앞에 있고 조선의 반석이 여기서 세워지겠으니 여기서 멈추면 장차 이 나라는 끝도 없이 지나간 구원(久怨)과 저들의 욕망에 휘둘려 나라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내 꿈은 저들의 욕망을 꺾는 것이 아니다. 내 백성과 조선의 앞날을 위해 이 땅이 몇몇의 무리에게 흔들리고 찢기는 것을 볼 수 없음이다. 조선은 더더욱 강건해질 것이다. 사직은 옥대처럼 든든하고 이 땅의 백성들은 아무도 주린 자가 없이 풍요롭고 그 법은 정당하고 이 모든 질서는 온전히 바르고 탄탄하여질 것이다.


나는 그런 나라를 만들 것이다. 내 아버지가 꿈꾸었고 내가 이루고 내 아들이 그 자리에 오를 것이다."


감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성곽을 따라 늘어선 먼 불빛들이 강줄기처럼 일렁였다.

밤공기가 차가워서 어깨를 떤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치받쳐올라오고 목울대가 흔들렸다.


그런 나라가 있을까. 온 세상의 군주들이 꿈을 꾸지만 그런 나라는 전설 속의 요순에서나 있었을 것이다. 요순에도 억울하게 죽는 백성이 있었을 테고 백성을 핍박하는 관리도 있었을 것이다. 무고하게 죽고 욕망을 위해 그 죽음을 만드는 이들이 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이 꿈을 같이 꾸고 싶다. 늙은 백성을 위해 죽그릇을 나누고 함께 거친 음식을 먹고 그들과 더불어 뒹굴며 말을 타는 왕, 이른 새벽부터 도성을 돌며 사대(射臺)에 서서 인재를 찾던 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에게 부여된 하늘의 뜻을 거르스지 않을 사람이다. 내 아비의 임금, 그리고 내 왕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의 꿈에 나도 함께 가고 싶다.


"뒤를 노리는 자가 있다. 궁에서부터 따라왔다 짐작만 할 뿐 누구인지, 몇인지도 전혀 모른다. 훈련이 끝날 때까지 너는 병방과 더불어 주위를 살피라."


전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고 서늘하여졌다.

건네주는 환도를 받으며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전하를 노리는 자!

아른한 불빛에 풀어졌던 마음이 일시에 얼어버렸다.


"오늘밤은 아닐 것이다. 사방에 이리 매서운 수족들이 내 옆을 지키고 있고 병장기가 울을 치고 있는데 감히 어떤 무리가 뛰어들겠느냐. 허니 너무 긴장하여 네가 살피고 있음을 천하에 떠들지 말거라."


전하는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물러서 있던 병방이 다가왔다.

자리를 벗어날 때이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다보면 어둠 속의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게 될 것이다. 훈련 중이니 돌아볼 곳 또한 많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전하의 뒤를 내 눈길이 따라갔다.

왕의 기세는 당당하고 그를 호종하는 이들 역시 빈틈이 없는 최고의 군사이다.

허나 그를 따르는 어둠 역시 깊었다.


환도의 손잡이가 차갑지 않았다.

나는 허리에 깊이 찔러 넣으며 손잡이를 다시 한번 어루만졌다.


그 밤은 깊고도 뜨거웠다.



* 그림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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