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원대로 그는 권력의 맨 안쪽으로 날아간 것일까.
그가 누구의 손자이고 그 조부가 자신들을 어찌 생각하며 평생을 살다갔을 지를 그들이 모를 리 없는데 어찌 저들에게 받아들여졌을까.
푸른 기가 돌도록 하얗던 헌의 손이 생각났다. 불일암에서 뒤척이며 잠 못 들던 밤, 귓가에 서늘하게 내려앉던 그의 낮은 말소리도.
무언가 그가 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대를 이어 권력을 누려온 그들이 왕과 대척을 지어 그 권력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한 지금은 어느 때보다 더 의심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들자면 헌은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아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왜 그러느냐?"
기형이 내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두 분이 이제부터 살펴주실 일이 있습니다."
나는 간단히 우리의 인연부터 이야기를 했다. 노론과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도세자 익위사의 자손. 불편한 그들의 처세. 그리고 간밤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주시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도발에 대해서였다.
"허. 대전(大殿) 벽에도 귓구멍을 박아놓았을 저들이 설마 사도세자 익위사의 손자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기형이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지근거리(至近距離. 임금의 지척) 내시부부터 도성 문지기까지라도 헛기침이라도 하는 인물은 죄다 저쪽 패거리 아니고는 디밀 수도 없는 것을. 저들의 정보력이 그리 허술하겠느냐?"
"그러니 이상하다는 말씀입니다. 초야에 묻혀계시기는 했지만 할아버지께서 야뇌형님들과 빈번히 교류하여 전하를 도운 것을 그들이 모르지 않을 터인데 어찌하여 지척에 두고 수족으로 삼았을까요?"
"윤헌의 됨됨이가 어떠한가?"
"속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으나 성정이 차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보의 이마가 좁혀졌다.
"야심이 있는 자인데 본디 명민하고 냉철하였다. 그런데 그 가문에서 학문으로는 출세는 커녕 조정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 처지. 규장각에 입재는 하였겠다 노심초사 입신양명에 몸이 닳은 자에게 저들이 꽤 구미가 당기는 떡밥을 던졌다면?"
"죽기를 맹세하고 달라붙었겠지. 저들의 충성심을 그들은 계속 시험할 테니 더 애를 쓸 터이고.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일 것이다. 적당히 뒤를 보아주고 어지간한 높이까지는 키워줄 수도 있다. 변절했다 하여도 그 뿌리는 어쩔 수 없으니 혹시라도 다시 칼날을 겨누더라도 쉽게 부러뜨릴 수 있는 거리 정도에 둘 생각을 저쪽에서 하였다면. 윤헌의 쪽에서라면 출세를 위해서라면 애초에 다른 기회가 없으니 저들의 내심을 안다 하여도 방도가 없는 일이고."
"눈에 번히 보이는 장용위 군복을 입고 우리가 뭘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만 주시해보마. 원행 마치도록 각별히 저들과 전하를 살피도록 하자."
굳어진 내 어깨를 기형과 동보가 툭 쳤다.
그날 득중정에서 별시가 치러졌다. 시험을 치르려고 장정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들을 관리하고 시험장을 정비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었다. 이들 중에서 또 몇이 나의 동지가 되고 수하가 될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홍패와 어사화를 받던 기억이 머리를 스쳐갔다. 벌써 이태 전의 일이었다. 몸에 익지 않은 무예십팔기를 익히느라 온 몸에 상처가 나고 격구를 하다 말에서 떨어져 이틀간을 혼수상태였던 일도 지나간 추억이었다. 그때는 번쩍이는 홍배를 가슴에 달고 할아버지를 뵈올 날이 있을 것이라 마음을 다독였다. 이제는・・・・・・ 내가 아무리 높은 무관이 된다 하여도 기쁘게 나를 반겨줄 할아버지는 안 계신다.
무과가 치러지는 사이 장용위들의 훈련과 승급시험이 있었다.
유엽전과 편전 두 활쏘기 종목에서 나는 장용영 최고 점수를 받아 종7품 부사정이 되었다. 장용위들의 무술성적과 진법시험 결과가 모두 좋아 병방은 이날 전하의 치하를 크게 받았다.
어느새 원행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왕의 능행을 치러냈지만 이번처럼 힘이 들고 마음이 쓰인 적이 없었다.
무구(武具)를 정비하는데 별장이 달려왔다.
"병방께서 찾으십니다."
* 그림 심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