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사랑에서 부르시기로 종종걸음으로 급히 건너갔다.
사랑에는 처음 보는 낯선 손님이 나리마님과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서른 중반의 헌헌장부로 눈매가 날카롭고 다부진 체격에 한눈에 보아도 책상물림 선비는 아니었다. 그동안 간간 낯선 손님들이 사랑채에 드나들면서 나리마님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날 본 손님은 처음 만나는 이였다.
"이 아이가・・・・・・"
"형서가 남긴 유일한 피붙이일세."
나리께서 고갯짓을 하시기에 나는 손님에게 읍을 하고 앉았다.
"죽은 네 아비의 오랜 벗이었다. 이름은 백동수이고 흔히들 야뇌라 하지. 앞으로 네가 간간 심부름을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뜯어보던 손님이 빙긋 웃으며 굳은 얼굴을 풀었다.
"형서가 혼인을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천만다행히 혈손을 남겼습니다. 눈매가 깊고 콧날이 우뚝하고 하관이 단정한 걸 보니 제 아비를 뺀 듯 합니다."
"저 아이마저 없었더라면 어쩔 뻔 하였느냐. 형서가 여나믄 무렵부터 몸이 남달리 날래고 민첩하여 기질이 천생 무관이다 하였더니 그리 허망하게 갈 줄을 어찌 알았나. 내 요즘 저 아이를 보며 그 아이 본 듯 마음에 위로를 삼는다네."
"송구합니다."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 아이를 부탁하네. 요즘은 통 어지럽고 가슴이 불편하여 쉬이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때때로 숨을 쉬기도 어려우니 갈 날이 멀지 않은 게야."
"무슨 참람한 말씀을・・・・・・"
"아니다. 저하께서 그리 참혹하게 승하하실 때 동궁 익위사로 제 주군을 지키지도 못하고 더러운 목숨을 늘여 살아왔으니 내 어찌 지난날이 죽음보다 나앗겠느냐. 저승에 가서 저하를 어찌 뵈올지 생각만 해도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구나."
나리마님의 주름진 눈가가 붉어졌다.
손님도 말을 잇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승호형님의 눈짓으로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사랑을 나왔다.
아버지의 벗이었다니.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아버지도 저렇게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을까.
손님이 댓돌에 벗어둔 녹피혜를 가만히 바라보다 내 발을 집어넣어보았다. 내 작은 발이 다 들어가고 뒤축이 반이나 남았다. 아버지의 발도 이렇게 컸겠지. 나는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스승의 심부름으로 야뇌어른의 집에 가끔 드나들게 되었다. 초어정이라는 작은 초당이었다. 집은 아담하고 조촐하였으나 드나드는 손님은 여럿이어서 내가 갈 때마다 어른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때로는 책을 쌓아두고 큰소리로 변론 주고받느라 내가 기다리다 지쳐 마루에서 졸다 자빠지는 것도 몰랐다. 어떤 날은 방바닥 가득 그림을 깔고 서로 평을 하고 시문을 나누어 지으며 놀기도 하였다. 그들 중 몇몇은 나라 안에서도 내로라하는 대단한 어른들이라고 승호형님이 귀띔을 해주었다. 전하와 무릎을 맞대고 나랏일을 하고 함께 책을 쓰는 고신(高臣)이라 했다. 내가 보기엔 저렇게 점잖지 못하게 큰 소리로 떠들고 선비답지 않게 그림을 보며 크게 웃고 감탄을 하는 무리가 설마 임금님과 그리 가까운 이들이라는 게 미덥지 않았다.
그래도 초어정 다녀오는 심부름은 즐거웠다. 무언가 책 보퉁이나 두루마리 그림 몇 점을 가지고 초어정에 다녀오면 근적이네가 나리마님이 심부름 값으로 주신 거라며 주전부리를 챙겨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밖으로 나가 거리를 쏘다니며 콧바람을 맡는 것은 답답한 집안에서 근적이와 소꿉장난을 하며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다. 우물가를 돌아나와 저자거리를 지나다보면 장사치들이 요란하게 손님을 끄는 정경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고소한 콩엿이며 깨엿, 인절미나 밤톨 같은 것들이 가득 쌓인 좌판 앞에서 넋을 놓고 눈 보시를 하는 것도 좋았다. 그리하여 초어정 심부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깨어 바람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추석을 넘기고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초어정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저자거리에서 큰 소란이 난 것을 보게 되었다. 주막집 마당에서 누군가 평상의 개다리 소반을 마구 걷어차며 손님을 쫓아내고 있었다. 토담 밖에서 혀를 차며 구경을 하는 어른들 틈 사이에서 까치발을 짚고 기웃거리는 내 눈에 온통 시커먼 수염으로 얼굴을 반이나 덮은 사내가 주막집 사내를 몹시 때리고 있었다.
"이놈! 세상이 아무리 고약하게 변했기로 네 놈이 감히 나를 희롱하느냐? 어디서 상놈 주제에 양반을 속이려 들어? 이 도둑놈! 네 진정 포도청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해야 잘못했다 소리가 나오겠구나. 아니 그럴 것도 없겠다. 오늘 정녕 내 손에 반 병신이 되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이놈!!"
사내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늙은 주막집 주인은 땅바닥에 뒹굴며 빌고 있었다.
"나리 무슨 말씀이십니까. 감히 소인이 뉘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룁니까. 어젯밤 분명히 닷 푼을 덜 주시고는 오늘 밥값 두 냥에 얹어 주시마 하셨지 않습니까."
"네가 끝까지 거짓말로 나를 우수히 여기니 참을 수 없다. 정녕 곤죽이 되어봐야 바른 말을 하리라. 그럼 양반인 내가 고작 술지게미 묻은 네 놈 닷 푼을 앗으려고 지금 이런단 말이냐?"
누구하나 마당으로 나서 말리는 이가 없었다. 보나마나 억지를 부리며 주인을 두들기는 성질 고약한 왈짜의 난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눈알을 부라리며 닥치는 대로 몽둥이질을 하는 사내에게 감히 어쩌지는 못하고 발을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속이 끓었다. 한번만 더 주먹을 휘두르다가는 바짝 마른 주인네의 허리가 부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마당을 구르던 주인에게 사내가 다가가 작대기를 치켜 올리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번쩍 달려가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하시지요. 이러다 저 분이 죽기라도 하면 나리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작대기를 내려치려고 잔뜩 힘을 주던 눈알이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두들기던 자신을 가로막는 것이 자신의 허리를 겨우 넘는 꼬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이가 없어 허허 웃는 것이었다.
"네 놈은 누구냐. 저놈의 아들이냐?"
"저 분이 아비는 아닙니다만 백주에 사람을 이리 패다니 어른께서 말씀하신대로 차라리 포도청에 가서 고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온 저자 사람들이 다 보이는 곳에서 이리 함부로 하십니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불이 번쩍 하였다. 내 머리통만한 그의 손바닥이 내 얼굴을 후려친 것이었다. 나는 마당 구석으로 나가떨어져 뒹굴었다.
"오냐, 네 그 나불대는 입을 내가 오늘 영영 다물게 해주마. 어디 상놈이 양반의 앞을 가로막으며, 감히 새까맣게 어린 녀석이 어른에게 바락바락 대든단 말이냐. 저 놈이 맞을 매를 네가 자청하였구나."
내 목덜미를 답삭 쥐고 들어올리니 나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진 꼴이 되어버렸다. 얼굴이 금세 부어올라 눈앞이 아득하고 찐득하게 무엇인가 볼을 적시는 것이 나가떨어지면서 머리통 어디를 바닥에 박으면서 피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사정없이 쥐어박히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양반의 법도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백주에 죄 없는 양민을 이리 잡는다는 말입니까. 새까맣게 어린 저는 어려서 맞고 어르신보다 나이가 위인 주막주인은 상놈이라 맞고. 이리저리 두들기고 죽이겠노라 하시니, 제가 어려서 법은 모르오나 그 법이 옳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이, 이놈이!!!"
순간 가슴팍이 터질 것처럼 욱신했다. 거대한 나무둥치가 날아들어와 박힌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고 화다닥 불벼락을 맞은 것처럼 통증이 밀려왔다. 빠지직・・・・・・! 무언가 내 몸에서 부러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도 같고・・・・・・ 피가 숨통으로만 몰려 달려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서・・・・・・
나는 넋을 놓아버렸다.
내가 깼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가물가물 등잔의 불빛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리마님의 사랑채였다.
머리맡에 나리마님과 승호형님, 그리고 고운 젊은 여인이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구나. 창아!"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말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가슴께가 타는 듯이 아파왔다.
"되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으니 한숨 놓아도 되겠다."
"의원 말이 뼈가 상한 것 말고는 다행히 다른 곳은 괜찮다 합니다. 아직 아이니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잘만 넘기면 뼈는 곧 붙을 거라 합니다."
"네가 고생했다. 불공을 드리고 돌아오자마자 험한 꼴을 보다니."
몸을 꼼짝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으로 떨어지는 귓가로 두런두런 어른들의 걱정어린 한숨이 들렸다. 이따금 손을 주물러 주고 어깨를 도닥도닥 어루만져주는 나리마님의 손길을 느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밤중에 어렴풋이 깨어 눈을 떠보면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나리마님과 승호형님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촛불 따라서 흔들렸다.
아・・・・・・ 별당아씨가 돌아오셨구나.
물수건으로 얼굴이며 가슴팍을 닦던 부드러운 손이 아씨였구나.
젊은 여인의 손길이 그리 따뜻하고 다정하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 밤은 길고도 깊었다. 밤새도록 나는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뒤척였고 그럴 때마다 승호형님의 얼굴이 다가와 나를 달랬다.
물속으로 빠져드는 듯 몹시도 고단한 밤이었다.
* 그림 오원 장승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