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상을 겸상으로 받아 물리고 나서 사랑으로 부른 청지기 앞에 나리는 나를 소개하였다.
"이 아이는 내 종질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져 수종을 들어 달라 부탁해서 들인 아이니 어리다고 함부로 여기지 말고 너희들도 내 손자인 듯 대하여라."
청지기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미심쩍으나 나리마님이 하시는 일에 자신이 토를 달고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승호를 불러 그 아이와 같이 지내도록 조처를 하게. 아직 어리니 함께 자도 괜찮을 것이다."
청지기는 곧 대답을 하고 물러났다.
그날부터 나는 사랑채에 딸린 건넛방에서 나리마님의 수종을 드는 승호형님과 함께 기거를 하게 되었다. 승호형님도 나처럼 본디 이 집안의 식구는 아니었다했다. 말수가 적고 살집이 풍성하지만 생각보다 몸도 빠르고 나를 보면 항시 넉넉하게 웃어주는 사람이었다. 상투를 튼 것을 보니 관례를 올렸을 테고 어렴풋이 그 나이대로 짐작을 할 뿐 본관도 자신의 옛말도 별로 하지 않는 이였다.
나도 미주알고주알 낯선 이와 말을 섞을 기분도 아니었다. 나리마님이 아무리 잘해주시더라도 나는 객식구, 언제든지 밉보이면 가차 없이 이 집안에서 떨려나갈 낙엽 같은 신세라는 걸 어린 눈치로도 뻔한 일이었다. 집 안팎을 드나드는 노복들에게 함부로 보일 것도 없겠으나 그들 눈치를 거슬러도 안 될 것이다.
지금까지 먹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입이 벌어지는 진찬상을 받고도 몇 술 뜨지도 못한 저녁밥은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아 체하고 말았다. 뒷간에 가 몽땅 토하면서 조금 아까워졌다. 외가댁에서는 한번도 먹지 못한 생선과 탕국이었다.
외숙부는 잘 돌아가셨을까. 어린 사촌들은 나를 찾지 않을까. 끼니때마다 표 나게 눈치를 준 것은 아니었으나 확연히 다른 밥그릇의 높이를 감추지는 않았던 외숙모도 그리워졌다. 외가댁에서 나는 밖에서 날아든 어미 없는 제비새끼 신세였으나 그래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옷을 걸치고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다 깨칠 수가 있었다. 기억에도 잡히지 않는 어미보다 외숙부가 생각이 나 자꾸만 눈물이 났다. 지난겨울에 깎아주신 팽이를 동생들에게 주고 올 것을, 아무 것도 모르고 얼결에 손에 붙잡혀 나왔다가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뒤란 간장독 아래 꽁꽁 감춰둔 그 팽이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행여 울음소리에 승호형님이 깨어 언짢은 기분이 들까봐 나는 이불을 틀어막고 큰 숨을 몇 번이나 쉬었다. 자꾸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그 밤에 승호형님이 몇 번이나 깨어 걷어 찬 이불을 덮어주며 내 이마를 쓸어주었던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집은 덩그렇게 컸으나 여러 곳이 낡고 적적했다. 아들 하나를 겨우 두고 안방마님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났다 했다. 그러나 그 아드님도 몇 해 전에 일찍 세상을 버리고 그 자식인 손주 남매와 며느님이신 별당마님이 주인식구의 전부였다.
이 집의 노복들은 낮에 본 사십대의 청지기 달재아범과, 막쇠네 부부 그리고 이들의 딸인 근적이가 전부였다 . 근적어멈은 안살림을 맡은 반빗아치였고 막쇠는 바깥채 허드렛일을 맡았다. 근적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린 계집아이였다. 눈이 까맣고 팔 다리가 가는 여윈 아이였는데 첫날부터 나를 보고 졸랑졸랑 따랐다. 어른들만 있는 집에 또래가 생겼으니 반가운 모양이었다.
첫날 쓴 얼굴을 감추지 못했던 청지기는 밖에 식구를 두고 혼자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들어 달재아범이라 불렸다.
여기에 객식구인 승호형님과 내가 있으니 작은 살림은 아닌데 집안이 텅 빈 듯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이상할 거 없다. 도련님은 재작년부터 절에 들어가 공부중이시고 아씨도 애기씨 데리고 절에 도련님 보러 가서 불공까지 드리고 오신다고 지난 보름에 나가셨으니 집안이 조용해서 그런 게다."
승호형님이 따뜻하게 웃으며 일러주었다.
"하긴 젊은 나리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북적거려봤자 노복들 뿐, 무슨 흥이 나서 활개치고 다니겠느냐. 노복들이야 주인 권세가 제 권세인 처지니 드나드는 사람도 좀 있고 큰소리 낼 일이 있어야 숨도 좀 쉬고 그렇지. 그래도 나리마님을 찾는 손님들이 제법 있단다. 이제 너도 심부름 다니느라 바빠질 일도 있을 터이니 심심하다 생각지 말고 시간 있을 때 글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거라."
엉겨 붙던 사촌동생들이 없으니 적적한 생각은 가끔 들었지만 답답하지는 않았다.
출타할 일이 거의 없는 나리마님은 일쑤 나를 사랑에 불러 글을 가르쳤다.
"쟁기 든 농부도 연장의 쓰임새를 알아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다. 간장종지만 한지 함지박 만 한지 네 그릇의 크기를 나는 알지 못하니 보이지도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겠느냐. 스스로 열심히 학문을 닦고 마음을 어질게 가꾸어 너를 이리 보낸 외숙부의 바람을 이루어라."
내가 하는 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랑으로 건너가 나리마님의 소셋물을 올려드리고 사랑채를 치우고 간밤에 보신 서책을 정리하고 나리마님이 시키시는 자질구레한 심부름 정도였다. 나리마님이 손님을 맞거나 몸이 편찮으시면 글공부는 승호형님과 함께 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나는 금방 외갓집을 잊고 새 환경에 익숙해져갔다. 나리마님의 당부대로 노복들도 별로 나를 불편하게 생각지 않았다. 물론 깍듯하게 도련님으로 대해준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런 처지도 아니었고 바라지도 아니하였으니 외숙부의 당부대로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조용히 지냈다.
지금도 생각난다.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내다보면 담장 아래 조금씩 여물어가던 석류알들. 깡총깡총 옷고름을 날리며 사랑채 마당으로 뛰어 들어오다 계집아이가 잔망스럽게 어딜 뛰어다니느냐고 제 어미에게 혼찌검이 나 질질 끌려가던 근적이. 나와 눈이 마주치면 혀를 쏙 내밀고 웃던 아이.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아 근적이와 놀다보면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장독대 아래 묻어두고 온 팽이 얘기도 근적이에게 해 주었고 근적이는 애기씨에게 받은 낡은 댕기며 소꿉살림살이인 깨진 사금파리 같은 제 소중한 보물들을 보여주었다.
절에 간 애기씨와 별당아씨는 돌아오지 않은 채 유월이 갔다.
* 그림 단원 김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