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뒤란을 나와 초옥의 창을 밤새 흔들었다. 밤새 뒤란 댓잎이 수런거렸다. 동지가 봄부터 키우던 닭이 얼마 전부터 대숲에 알 낳을 자리를 보는지 골골하더니 어젯밤에는 어지간히 심란하였을 것이다.
지난밤에는 까닭도 없이 잠자리가 불편하여 뒤척이다 삼경에 이르자 나는 일어나 창을 열었다. 늦가을 밤의 달빛이 소나무 그늘에 걸려있다 창을 여는 소리에 성큼 뜰 안으로 다가들었다. 쌀뜨물처럼 부연 달빛이 싸리문 밖까지 길을 내었다. 치마폭을 펼쳐놓은 것처럼 떠오른 달빛에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를 붓으로 삼아 긋고 지나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써늘한 밤공기가 닿자 살집이 없는 마른 어깨가 후두두 떨려왔다. 동지가 내다보았더라면 싫은 소리를 하였을 것이다. 늙고 병든 몸이 밤바람에 미역을 감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아이들을 심란하게 할 것이다. 영창을 닫았다.
병든 몸이 하루가 다르게 가파르게 시들어가니 이 가을을 다시 볼까 저 봄내를 다시 볼까 매양 새로이 보일 뿐이다. 허나 아쉬운 것은 아니다. 언제 어느 때에 칠성판에 눕는다 하여도 서러울 일도 아쉬울 것도 없는 인생, 이만하면 살만큼 살았다. 이미 아이들이 출사하여 제 세상을 뻗어나가고 있고 명리에 미련을 둔 바 애초에 없으니 어찌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생각하면 육십 평생 지금처럼 조용하고 편안한 적이 없었다. 머리가 깨이고 내 발로 골목을 뛰어다니기 시작한 후로 언제나 상처투성이, 바람 잘 날 없던 삶이었다. 죽을 날이 가까워와 문득 돌아보니 바람기 배인 그 나날에 한줄기 그리운 햇살이 있어 내가 살았던가. 바람의 생애 나를 스쳐간 그리운 얼굴들, 머지않아 그들을 다시 만날 것이니 어찌 죽음이 두렵기만 할까. 모두 떠난 자리에 거죽만 남아 뒷자리를 차지하고 늙어감은 애초에 내가 꿈꾸던 모습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욕되다 할 것이었다.
오직 하나 바라기는 시나브로 시들어가는 기억이 끝내 어두운 장막 뒤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평생을 간직한 말 한마디를 내어놓고 가고 싶을 뿐이다. 누가 알랴. 사내의 몸을 빌어 태어나 바람처럼 떠돌며 살아온 생애, 평생 단 한 번의 그 마주침, 누구에게도 차마 보이지 못한 그 짧은 한 꽃볕이 내 삶의 전부였으니 이제 내가 눈을 감으면 이 기억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아 내 무덤 속으로 함께 들어갈 뿐이겠으나 말로는 차마 하지 못했던, 가슴 밖으로 나와 차마 꺼내보지도 못했던 그 가난한 사랑에 마지막 위로로 추억하고픈 것이다. 아마도 노추일까. 이것조차 가슴에 품고 떠나야하는 부질없는 홍진일 뿐일까. 그럴 것이다. 허니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아무도 모르게, 내 자신조차 속이며 닫고 묶어왔던 말을 이제 꺼내어 내게 보이고 싶다. 부질없는 말들이 늘어지고 추연해지니 역시 늙은이의 망령된 징조이니 허탈하도다. 알면서도 끝내 끊어내지 못한 오욕의 그 시간들처럼.
이제 창밖은 미명이다.
담묵이 번져가듯 문살 창호지가 천천히 새벽빛에 녹아들고 있다.
나는 옷을 고쳐 입고 서안을 끌어당겼다. 연적의 물을 따라 먹을 조용히 갈았다.
* 그림 김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