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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19.

by 소금눈물 2011. 11. 10.

12/23/2003 10:19 pm공개조회수 0 2



광주지원의 강력계 검사라니.
광주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 환자 일인가. 환자 일이라면 보통 병동의 스테이션을 찾을 일이었다. 담당교수도 퇴근한 이 시간에.

"앉으시지요"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를 가리켰다.

그는 몹시 피곤해보였다.
그러나 단정하고 흠이 없어보이는 외모였다. 소파에 앉았는데도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신이었다.
"무슨 일로..."
그는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가 말썽을 부려 교사 앞에 불려온 학부모 처럼 잠시 쭈빗거리던 그가 입을 떼었다.

"조 영....이라고. 환자 아시지요"
나는 순간 긴장했다.

영이, 무슨 일인가. 무슨일로 강력계 검사가 그녀를 찾는가.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를 곧장 응시했다. 불안해졌다.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글쎄요...제가 맡은 환자 중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다. 내가 맡지 않아도 병동에 찾아가면 입원환자 내역이 칠판에 붙어 있을 것이었고, 아니 원무과에 가도 간단하게 확인이 될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영이는 제 동생입니다"

동생? 동생이라고? 가족이 없다 하지 않았나? 마을 이장도 한 말이었고 창도 분명히 그랬었다. 가족이 있다면 그녀가 남의 집에서 업동이로 들어가서 절에서 자랐을리도 없다.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담배를 꺼내는데 나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창에게, 말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그녀는 몸도 안좋은데 몸을 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찌하나.
영이 무슨일로 이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일까. 나는 영이의 죄를 생각하기 보다 먼저 그녀를 어찌 피신시켜야 하는지 그것이 먼저 가슴을 짓눌렀다.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갖가지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고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선생께서 간밤에 영이를 각별하게 살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연락을 늦게 받았습니다. 서둘러 출발했는데도 도착해보니 이렇게 늦어버렸습니다."

나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에게서, 영에게서 듣기 전에는 나는 이 사내에게 단 한마디도 그녀에 대한 말을 하지 않을 참이었다.

완강한 내 의지가 들킨 것일까.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찌푸릴때 콧등으로 작은 주름이 졌다.
나는 창의 볼우물을 떠올렸다.영을 볼 때마다 한없이 부드럽고 깊어지던 그의 볼우물이, 갑자기 불안하게 그리워졌다.

"같이 살고 계시는 분인가요?"
나는 어중간하게 대답을 했다. 그녀를 안다고도, 알지 못한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애는 지금은 지리산에 있습니다. 오빠라곤 하지만 아주 어렸을때 헤어지고 늘 따로 자라서 마음만 애틋하지 실상은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습니다. 좀 복잡하게 자라서요"

"네에"
나는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그 아이를 보셨으니, 흉터도 보셨겠습니다만. 그게 저 때문에 생긴 겁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몇 년전에 그애하고 그애를 길러주신 양부모님이 탄 차를, 저희가 쫓던 놈들이....."

"그랬습니까"

쿵, 하고 가슴으로 무언가 바위 같은 것이 떨어졌다.

"양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 참 그애는 외삼촌이라고 부르더군요. 성때문에 그리 된 거겠지요. 저 애는 한달만에 깨어났습니다. 무사한 건 양어머니 뿐이었지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저 아이 상태..어떻습니까? 응급실에 들렀더니 간호사가 선생님 얘길 하더군요. 밤새 지키셨다구요. 아마도 다른 선생님보다 더 잘 아실듯해서"

"그 분은 저보다는 담당 교수님이 더 잘 아실듯 합니다. 당직이 아니어서 자세히 보지도 못했고...죄송합니다"

영과 창을 만나기 전에는, 그들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는 나는 아직 이 사람을 믿지 못했다.

그는 회피하는 내 말을 무시하듯 잘랐다.

"많이 안좋습니까?"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조각 같은 외모였다. 따뜻하고 정깊어 보이던 창과는 달리 굳은 콧날이 차갑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인가.깊고 부드러운 영이의 눈매가 어디쯤 이 사내와 닮았다는 것일까.

"그분의 건강상태를 대충은 아시겠지요.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폐렴이 좀 와 있는 상탭니다. 젊은 분이니 폐렴 정도는 가벼울 수도 있지만 워낙에 폐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출기가 울렸다.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이 사내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가족이라면 윤보다 먼저 이 사내에게 더 의지해야 하겠지만 어쩐지 호감이 들지 않았다.
영이를 누구보다 더 아껴주고 지켜줄 사람은 창 밖에 없으리라는, 믿음과 아픔 때문이었을까. 그의 오빠가 아니라 아버지라도 창보다 영을 더 잘 알고 사랑을 줄 사람은 없다는 확신이 새삼 들었다.

내가 호출기를 확인하자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체념을 했다.
나에게서 쓸만한 말을 끝내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 차린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바쁘신 것 같은데, 이만 가 보지요"
그가 일어섰다. 나는 공연히 더 부산스럽게 따라 일어서며 악수를 청했다.
"자주 찾지는 못하겠습니다만, 퇴원하기 전에 한 번 더 오지요"
그가 부드럽게 손을 쥐었다. 마주 악수를 한 내 손에 땀이 배었다.

그를 보내고 서둘러 호출한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환자는 위급한 상태가 아니었다. 서둘러 처치를 하고 나는 영의 병실로 항했다.
하루종일 보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그 사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창은 보이지 않고 영이 혼자 잠이 들어 있었다.

병실은 이인용이었는데 병훈에게 한 부탁이 먹혔는지 반대편 침대는 비어 있었다. 되도록이면 부담을 주지 않게 그 방엔 다른 입원 환자를 들이지 말라고 했었다.

가습기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뿌연 김이 창을 가득 채웠다. 창밖을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환자 상태보다 터무니없이 조도가 높은 전구가 차갑게 반짝였다.
나는 먼저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내려 있었다.
내 손길이 닿자 잠들었던 그녀가 눈을 떴다.

나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까칠한 입술이 살짝 가로졌다.
나는 가슴으로 예리하게 찔러 들어오는 금속성을 느꼈다. 내게 처음으로 보이는 미소였다. 나도 웃어주고 싶었는데.....쉽지가 않았다.
나는 무뚝뚝하게 방 안을 돌아보았다.
"나가셨나 보군요"
"준비할 것이 있다고 잠깐 시내로 나갔어요"
그렇겠구나.

영에게 조검사 얘기를 해 줘야 하는 걸까.
그녀가 일어나려고 하느니 몸을 움직였다. 나는 황급히 제지했다.
알리지 말아야겠다. 그녀를 다치게 한 사람이라면 어쩌면 창에게 먼저 말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검사.....제, 오빠를...보셨지요?"
그녀는 말갛게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부탁이예요. 오빠에겐 말하지 마세요"
어떤...오빠를 말하는 건가.
"그 사람이 왔었다는 걸 알면 오빤 괴로울 거예요. 오빠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말하지 말아주세요"

"염려 마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그러마...

하지만 영이 창을 염려하듯이 창이 영을 염려한다면 누구보다 그 사람이 알아야 하는 일 같았다. 더구나 친오빠의 등장이 그녀를 그토록 두렵게 한다면 더 더욱.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병실을 나왔다. 그녀가 힘겹게 눈을 감는 걸 보고 병실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천천히 돌아서는데, 창이 문 앞에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조검사가 ....왔던가요"
무겁고 침통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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