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고등학생이 된 창이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안방쪽에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게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 아버지의 말에 이어 둔탁한 말이 이어졌다.
"제가 오빱니다. 제가 친족이라구요. 지금까지 길러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마는 저 아이는 제가 데려갈 겁니다"
"이보게, 아직 저 아이도 어리고 자네도 자네 공부가 남았지 않나. 데려가서 어쩌자는 겐가.밥이라도 제대로 해 먹일 수 있겠나?"
누굴 데려가겠다는 건가.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가.
창의 얼굴이 삽시간에 질렸다.
창은 다짜고짜 안방문을 열었다.
얼굴이 굳은 아버지의 앞에 건장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나가 있거라"
호통을 치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청년 옆에 주저 앉았다.
"아버지, 이사람 누구예요? 누굴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청년은 창의 말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갓 스물이 지났을까. 단정하지만 차가운 표정이었다.
"자네는 자네만 생각하는가? 저 아이가 받을 충격은 생각도 않는 겐가? 겨우 일곱살이야. 지금까지 자라온 환경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도 충격일텐데 데려가서 저 애를 어쩌겠다는 건가. 저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데리고 있겠네. 대학을 마치면, 그때 데려가게. 공부는 마저 해야지 않는가. 자네 말대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지 않은가.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어찌 그리 무심하게 자네욕심만으로 아이의 앞길을 망친다는 겐가"
"아버지, 왜 그러셔요. 영이를 누굴 주겠다는 거예요. 영이는 우리 식구예요. 제 동생이라구요"
창의 절규에 청년의 얼굴이 잠시 흔들렸다.
창은 아버지의 앞에 꿇어 엎드려 펑펑 울었다.
창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영이가 다른 식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영의 성은 창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언제나 창의 가족이었고 부모와 함께 남은 날들을 어깨를 나누며 살아갈 누이였다.
그런 영이에게 다른 가족이 있다니, 그리고 그 가족이 영이를 데려가려고 나타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붙이를 베는 아픔을 창은 느꼈다.
영이의 오빠라고 나타난, 난생 처음 보는 이 청년에게 격렬한 살기조차 느꼈다.
어깨를 떨며 창이 오열을 하자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와 창의 어깨를 안았다. 어머니도 낮게 흐느끼면서 창의 어깨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망연히 보던 청년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고등학교만 마치면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대학은 제가 보내겠습니다. 저도 영이를 데려가기 위해 준비를 하지요. 단....그때까지 저는 제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영이를 만나겠습니다. 저는 하나밖에 없는 저 애의 오빠니까요."
그리고는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가 조형가였다.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영이를 소유하겠다고 주장하던 그 법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