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눈을 붙였던가.
가물가물 낮아지는 의식속에서 퍼뜩 정신이 든 것은 가느다란 신음소리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던 나는, 그러나 곧바로 주저앉았다.
영이였다.
괴로운 듯 눈을 깜박이다가 겨우 떴다.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던 듯 창이 영에게 몸을 기울였다.
"정신이 드니?"
나는 주머니속의 청진기를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끼어들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아까 들어온 탈장꼬마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차트정리를 하던 간호사도 자리를 비우고 응급실에는 그날 따라 빈 침대가 많았다. 창밖은 아직도 빗줄기, 캄캄한 나라였다.
"아프니...."
낮고 둔탁한 음성이었다. 심장이 갈라진듯 차고 단단하게까지 들리는 말소리였다.
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아프다...."
그의 말소리는 피아노의 맨 아래음 처럼 낮아졌다. 거의 속삭이는 말투였다. 누가 부르면 금새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물기가 가득했다.
"오빠....."
힘겹게 영이 입을 떼었다.
"네가 이럴 때마다.....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제발....나를 더 힘들게 하지 마라...."
영이 눈을 감았다.바르르 떨리던 눈썹이...젖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오빠 앞길을 막았어. 오빠가 나 때문에 힘들어지는 걸 볼 수가 없어. 차라리...그냥 죽어버리는게 나을 것 같애"
"너를 잃고....내가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창의 목소리는 떨려서 제대로 흘러나오지가 않은 듯했다. 화선지에 배는 꽃물처럼 창의 목소리가 영의 얼굴에 번져들었다.
영은 힘겹게 손을 뻗어 창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창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아래로 한줄기 눈물이 고요히 흘렀다.
시간은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말을 잊고 눈을 감은 채 서로의 손으로 전해오는 체온을 느끼며 가슴을 떨고 있었다. 영영 놓칠뻔한 작은 새를 다시 찾은 것처럼 창은 조용히 흐느끼고, 영은 창의 손을 끌어 가슴에 안았다. 다시 놓치 않을 것처럼 자꾸만 가슴에 얹혀진 창의 손을 쓰다듬었다. 둘의 손이 단단히 얽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먹먹한 통증이 둔탁하게 쳐올랐다.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괴로운 얼굴로 마주한 저들은, 그러나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비추어졌다.
메트로놈처럼 벽 시계가 재깍거렸다. 눈을 감은 내 귀에 사정없이 망치질을 해 대고 있었다. 그토록 깨기를 기다렸건만, 나는 순간 영이 그대로 잠들어 버리기를, 그래서 저 사람이 나처럼 고통스러워하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나는 초인적인 힘으로 입술을 깨물며 그들을 다만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연약하고 가장 서러운 모습으로, 한 사내의 퍼붓는 열기와, 또 숨어있는 다른 사내의 차가운 슬픔을 그대로 안고 영은 오래도록 눈을 감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의식이 깨었던 영이 다시 잠이 들었다.
머리밑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일어나 혈압과 맥박을 재 보았다. 정상이었다. 혈당도 올라와 있었다.
열때문에 붉게 상기가 되어있던 영의 얼굴이, 잠이 깊어지면서 좀 편안해졌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폐렴이 문젠데, 남은 한쪽이 제 구실을 다 해줘야 하는데....게다가 당뇨때문에 면역성이 떨어져서 쉽지는 않을 겁니다. 지켜 볼 수 밖에요."
청진기를 거둘 동안 잠자코 나를 바라보던 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새에 눈가가 깊이 파여 있었다. 삐죽이 돋기 시작한 수염이 듬성듬성 보였다. 얼굴이 희여선지 그것은 불빛에 더 도드라져 보였다.
"좀 ...쉬시지요. 다른 보호자는 안계신가요?"
창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족입니다."
아니, 다른 가족 같은 건 필요치 않다는 듯이 단호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