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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16.

by 소금눈물 2011. 11. 10.

12/23/2003 08:56 pm공개조회수 0 0


험한 잠자리에서 겨우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무슨 꿈을 꾸었던가.
끝도 없는 긴 길을 나는 혼자 걷고 있었다. 억새가 뒤엉켜 발을 디밀지도 못하게 헝글어진 마른 숲을 나는 힘겹게 헤치고 나갔지만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소리없이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는 키높이로 쓰러졌고 마른 흙이 사정없이 눈으로 뛰어들었다.
목이 따갑고 아팠다. 나는 끝도 없는 길을 걸어갔다.

호출기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면서도 몸은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불을 켜니 두시가 넘었다.

"이선생, 응급실이야. 그런데 누가 찾는데?"

이런 젠장.
어떤 미친 놈이~!
온 몸이 뻐근했다. 잠자리가 무거웠던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구겨진 가운을 챙겨 걸치고 내렸을때, 응급실 복도에서 마주친 것은 뜻밖에도 창이었다.

초조하게 복도에서 서성이던 창은 나를 보자 황급히 다가왔다.

"어떻게...."
"영이가...."

차마 말을 떼지 못하고 얼굴이 굳은 그를 보고 나도 철렁했다.

나는 황급히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
창백하게 늘어져 누워있는 영의 팔엔 20% 고농도 포도당 수액이 달려있었다.

"뭐냐?
"저혈당인데요?"

빠르게 차트를 훑어내려갔다.
혈압 80/45 맥막 55. 열은 없고 연속으로 잰 혈당 수치가 LOW, 잡히지 않았다.

"wbc(백혈구 수치)가 많이 올라가 있습니다, 18000개입니다. 빈혈이 있고,Chest P-A(흉부 X-ray)상 폐렴 소견이 보입니다"

얼굴이 부시시한 인턴녀석이 떠듬떠듬 말했다.

눈치가 심상찮은 보호자와 , 선배의 반응때문에 얼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뭡니까?"
참지 못하고 창이 대답을 재촉했다.

"당뇨가...있으셨습니까?"

얼굴이 질린 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X-ray필름을 걸고, 청진기를 꺼내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영의 흉부사진....폐 한쪽이...비어 있었다.
옷자락을 젖혔을때....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목 아래부터 옆까지 사정없이 지나간 흉터,...나는 옷자락을 덮었다.

"삼십분 단위로 혈당 체크하고 5% 하나 더 달아. 혈당 변화 생기면 곧바로 콜해"
"네"

나는 응급실을 나왔다.

창이 정신을 놓은 영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 따라나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창은..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구두코만 바라보다 힘겹게 말을 떼었다.

"사고였어요....사고로, 폐를 잃고 췌장을 잘라내고...그러면서 당뇨가 왔어요. 그래도 지금까진 나쁘지 않았는데 낮에 비를 맞아선지 저녁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어요.낮에 CT랑 피검사를 하고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내일이면 어차피 볼 거라 날이 밝으면 병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은 췌장에서 만들어진다. 사고로 췌장을 다쳤으면 당뇨가 올 수가 있다.
저혈당이 왔으니 혼수까지 이어지고, 바이탈 사인이 떨어진 것이었다. 포도당 주사를 맞았으니 폐렴문제만 아니라면 곧 깨어날 것이었다. 백혈구 수치가 높은 것이 걱정이었다. 정상이라면 10000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깨어난다 해도 지금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저혈당 보다도, 일단 폐렴기가 있으니 안정해야 합니다. 날이 추워졌는데 거기까지 가시는 건 무립니다.주사를 맞았으니 다른 합병증만 아니라면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그런데,, 저런 증세가 자주 있으셨습니까?"
"가끔...새벽이나 산을 오래 타면...."

혈당 조절이 안된다는 말이겠지.

"요즘 부쩍 힘들어했어요.살도 많이 빠지고. 평소엔 제가 다니면서 약이랑 주사를 챙겨가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데리고 나왔는데...."

창이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담배를 꺼내서 건넸다. 금연구역이었지만 밤이라선지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창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다시 집어넣었다. 목이 깔깔했다.

"며칠 계셔야 할 것 같은데요. ..."
"괜찮습니다"

어두웠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길어질지도 모릅니다.마침 제 집이 이 근처고, 저는 날마다 병원에서 먹고 자니 집은 비어있는데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뭐 호텔같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창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창은 영이 잠든 내내 침대를 지켰다. 하얗게 굳은 얼굴로 이따금 영의 얼굴을 쓸어보다가, 손을 주물러 보고, 그러다 한숨을 쉬며 고요히 바라보곤했다.

나는 멀찌감치서 그들을 바라보다 이따금 혈압을 재고 혈당을 재볼 뿐이었다.

종일 내리는 비때문에 응급실 공기는 눅눅했다.

그날 따라 응급실은 조용했다. 으례히 들릴 법한 구급차 경보음도 없었고, 새벽녘이 되어서 탈장증세를 보이는 꼬마하나가 들어왔을 뿐이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복도를, 간호사들은 물고기처럼 조용하게 오갔고, 인턴들은 구석에서 졸고 있었다.

영이 깨어난 것은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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