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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호메로스- 램브란트

by 소금눈물 2011.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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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드를 처음 만난 것은 엉뚱하게 하인리히 슐리이만의 전기를 통해서였다.

이 무지막지한 독일인 문화 약탈자.
말이 고고학자이지 장사를 하여 엄청난 재산을 이룬뒤 그 자산으로 이타카와 트로이 유적을 답사한 뒤 일대를 '파헤쳐' 엄청난 유적을 발견한다.
후에 트로이 유적은 아니고 데르베르트 유적이었음이 밝혀졌지만 그의 발굴은 미케네 고분까지 이어져 전설로만 전해오던 고대그리이스의 화려한 문명이 빛을 보았다.....라고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이 엄청난 황금유물들을 밀반출하여 베를린으로 빼돌렸다.
하긴 이때의 제국주의의 힘은 늘 이런 것이었다.
우리 역사와 문화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보다 일본을 찾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유물들을 제 것으로 삼고 아내의 이름도 헬렌으로 바꾸고 아가멤논의 (트로이 전쟁의 한쪽 수장이었던 그 그리이스의 왕) 황금가면도 자랑스럽게 보였다.

"이 망할~!"
어렸을때 화려한 황금유물과 미케네 석조유적을 보면서 감탄하면서도 든 생각이었다.

그 책의 부록에 일리아드가 있었다.

일리아드...
잊을 수 없는 첫사랑.
아킬레스. 헥토르. 클리타임네스트라.아이아스, 파트로클로스.....
영웅들과 그의 적들, 불행한 어머니와 슬픈 여인네들.
어리석은 신과 가련한 인간들의 죽음과 사랑...노래와 운명....

그 거대한 그리이스의 문화 기반을 이루는 뿌리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쓴 시인이 호메로스이다.
못생긴 이 맹인 시인이 불러온 이 거대한 서사시는 단지 그리이스 문화의 기반일 뿐 아니라 기독교문화와 더불어 서양정신문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한다.

그가 그토록 애통해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찬란한 트로이의 멸망을, 어린 나는 아주 냉정하고 당연하게 바라보았다.
전쟁이 무엇인지, 얼마나 어리석은 '정치의 연장'인지 그 전장에서 가장 억울하고 참혹한 이들은 결국 이름없는 병사 수십 수백만의 목숨일 뿐이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을때니 내겐 아킬레스와 그의 어머니 테티스, 고작해야 헥토르의 비극일 뿐이었을 것이다.

호메로스의 얼굴은 조각으로도 등장하는데 램브란트의 얼굴과 과히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못생기고 투박한 이 맹인 시인의 머리에 어쩌면 그처럼 장대하고 웅장한 한 세계의 뿌리, 혹은 수천년을 흘러 아직도 단단히 박힌 그 정신의 한 근간을 이루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램브란트의 호메로스는 그다치 명철해 보이지도 비장해보이지도 않는 인물이다.
퉁퉁한 몸집에 옷차림도 소박하고 머리숱이 빠진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보잘것 없는 얼굴에 램브란트는 한 문명의 수호자를 부어넣었다.
빛의 램브란트라는 말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하고 화려하지 않은 몇 종류의 색감으로도 이 세계의 수도승같은 얼굴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램브란트가 아니었으면,
그림의 주인공이 신화속의 인물이나 성경속의 이들이거나 혹은 고관대작이 전부일 다른 화가들이었으면
아마도 호메로스는 훨씬당당하고 폼나는 얼굴로 나타났을 것이다.
고개도 당당히 들고 팔짱을 끼고 있거나 값비싼 두루마리라도 들고 있지 않았을까.

진정한 서민의 얼굴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이 선각자 램브란트는 잘나지도 못하고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은 노인의 얼굴 위로 트로이 멸망을 그토록 가슴아프게 애통해하며 지켰던 그를 부른 것이다.
호메로스가, 불타는 트로이를 두고, 트로이 성안에 들어온 목마를 울며 그렸던 그가 어찌 아름답고 당당한 얼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서야 나는 불타는 트로이에서 끌려가는 유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 10년의 전장에서,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채 죽어간 그리이스 병사들을 생각한다.

아 역시
전쟁은 사람의 심장을 가진 자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전쟁도 정당한 전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