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2007 09:31 pm
정조는 학문을 생활화한 군주였다. 일상생활에 근거한 실용 학문을 제창함과 동시에 스스로 고된 경명행수(經明行修)의 도를 실천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종경(宗經 경학을 근간으로 함)이었다. 문학의 근본 역시 종경이었다. 문풍은 정치 현실이 반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문체책은 결국 주자학적 도학자들의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에 의한 복고책으로서, 그 회귀점은 우선 국초의 질박한 문풍이었지만 종국의 귀착점은 육경학(六經學)이었으며, 정학= 경학 = 실학 으로 표현되고 있다.
p.65
다시금 남은 뜻이 있는 예리한 사람 중에서 재주가 있어도 없는 듯 하고 뜻을 지니고도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면서 즐겨 초목과 함께 썩고자 하는 사람은 세속에서 이른바 한낱 이름뿐인 사람(서얼을 지칭)이다. 이들은 인륜의 상칭을 알고자 하면서도 천리 밖에서 함께 하지 않는 풍속을 사모하고, 스스로 유유상종하여 뒤섞이지 않아야 함을 알고 있으니 <수호지>처럼 십칠자가 발분하는 이야기 보기를 즐기고, 시문의 말단을 좇는 데에 이른다. 그래서 걸핏하면 서로 모사하고 그려내도 음조가 고르지 않으며 유능한 자가 거의 없으니 초연히 어느 곳에서 뛰어남을 드러내리요? 이것은 또한 조정의 책임이지 저들의 죄가 아니다.
p76-77
하늘이 인재를 지분(신분)에 따라 내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자신이 이들을 등용해 조명하는 것은 평소의 지론인 "부불기성 각적기기(不拂其性 各適其器)'라는 적재적소의 인재등용 원칙을 바탕으로 시행하는 정책이며 그 목적은 회귀지묘(會歸之妙)를 기대하는 것이라 했다.
p.78
정조가 의도한 바 '문체반정'의 기치를 내건 탕평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노론계의 많은 인물들이 시파로서 정조의 지지자로 전향하고, 끝까지 당론을 고수한 무리들은 벽파로서 강고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게 된다. 한편 실학파로 불리는 기호남인들은 정조의 옹호를 받으면서 미약한 정조의 세력기반의 한 귀퉁이를 고여주는 버팀돌의 역할을 했으니 채재공, 이가환,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일군의 학자군이 그들이다.
한편 당대 사회 문제가 되어 있던 서얼들도 탕평책의 원칙에 의해 통청(通淸)의 직(職)으로서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었다. 이들을 등용한 데는 물론 당대의 신학문인 북학을 규장각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규장각에 모아들인 인대들을 각기 그 특성과 소양에 따라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될 재목으로 키우려는 원대한 안목으로 편달과 지도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정조의 문장론 내지 문학이론은 남인 실학파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육경에 기본을 둔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내지 문학적 유사성 외에 정치적으로도 강력하게 세력을 부식하고 있는 노론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남인의 존재 가치는 큰 것이었다. 더구나 전(前) 시대의 예론에서 보듯이 노론과 남인간에는 정치이념에 있어서도 왕자(王者)와 신자(臣者)를 동격에서 보려 하는데 반해 후자는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하여 왕권을 절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따라서 왕권강화가 지대한 관심사였던 정조에게는 후자인 남인학파의 복고성 내지 왕권우위의 사상이 신권을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노론계의 그것보다 훨씬 유리한 것이어서, 남인과의 유착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치자(治者)로서의 정조의 입장이었고 개인으로서의 정조는 당대의 대학자였다. 따라서 그는 신사조(新思潮)에 민감하게 반응해 북학자들을 등용, 규장각을 통한 문물의 개화에 몰두하면서 청(淸)문화의 수입에도 열정을 쏟는다.
p.81
정조는 학자로서의 개인의 입장과 치자로서의 공인의 입장 사이에 미묘한 갈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효종대의 송시열 이래 국론화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북벌론이 팽배한 가운데 양자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정당화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정책이나 여러가지 조치는 상당히 복합적이며 탄력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러한 정책 수행의 효과적인 방안으로 '문체반정'이라는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운용의 묘를 통해 고립무원의 어려웠던 초기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고 시파를 형성시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그것을 토대로 어느 정도의 왕권강화와 왕조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이른바 조선 왕조의 도미(掉眉, 문장이 결론에 힘이 있음)적 성관(盛觀)인 '문예부흥'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p.82
정조 의한 체제 정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난 1782년(정조 6) 벽파로서 수세에 몰려 있던 이택징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는 정조의 치도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우선 정조가 즉위한 후 '선조교목지가(先朝喬木之家. 영조대의 척신, 세도가 집안)"가 태반이나 삼예, 참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제하고 치국의 도로서 명분과 기강을 강조한 다음 규장각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첫째, 정조가 각신 및 초계문신들에 대해 우신지도(友臣之道)를 극진히 하여 각신들이 월권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
둘째, 각신의 등대(登對)는 마땅히 승정원을 통해야 하고 그 사실을 조보(朝報)에 반포해 정정당당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
셋째, 규장각의 정비가 과다해 재정상 곤란을 가져온다는 것.
넷째, 언로(言路)가 막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규장각은 전하의 사각(私閣)이지 국중(國中) 공공지각(共公之閣)이 아니며 각신(閣臣)은 전하의 사신(私臣)이지 조정 인재지신(隣哉之臣)이 아니다"라고 극론했다.
p.89
결국 규장각은 그 성격이 복합적인 것으로, 우선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던 정조가 척리(戚里)를 소탕하고 환시를 배제하는 데 있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인재를 포섭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다음은 급박했던 초창기를 넘기고 정세가 안정되자 비로소 제도적인 정비가 이루어져 정치색을 표백시키고 점차 문화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어 "우문지치 작인지화(右文之治 作人之化 문치주의와 인재양성)"이라는 규장각의 이념에 따라 인재양성의 기능이 강화되니 1781년(정조 5) 규장각에 부설되는 초계문신제도가 그것이다.
p.91
-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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