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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 1

by 소금눈물 2011. 11. 7.

 

12/03/2007 05:19 pm


15세기 한국어는 지금 한국어와 달리 성조(聲調)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15세기 한국인과 지금의 한국인이 자신들의 모어(母語)로 의사를 소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p.17

김현이 자주 내비쳤듯 말들의 풍경이 결국 욕망의 풍경이라면

p.18

'ㄱ' 소리가 단단함의 상징이라면 'ㄹ'소리는 무름의 상징을 지녔다. '죽다'와 '살다'에서 그 단단함과 무름의 맞섬이 또렷하다. 'ㄱ'이 죽음의 소리라면 'ㄹ'은 삶의 소리다. 'ㄹ'은 'ㄱ'하고만이 아니라 'ㄷ'하고도 맞선다. 'ㄷ'이 닫힘의 소리라면,'ㄹ'은 열림의 소리다. '닫다'와 '열다'에서 이미 그 두 소리는 표나게 대립한다. 살아 있다는 것, 열려 있다는 것은 흐른다의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ㄹ'은 액체성의 자음이다. 그 액체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동사 '흐르다'에 이미 'ㄹ'이 흐르고 있다.

품사가 품고 있는 이 흐름과 닫힘의 상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이의 눈은 아름답다.
이렇게도 우리 모국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

p. 43

언어민족주의의 칼날이 무슨 이유로든 칼집을 벗어났을 때 그 칼끝은 직접 외국어를 향하기보다 민족어 안의 '불순물' 곧 외래어를 향하는 것이 예사다. 외국어 자체는 언어민족주의자들로서도 맞서 싸우기가 너무 버거운 상대다. 반면에 외래어는 사뭇 만만한, 그러나 가증스러운 내부의 적으로 비친다.

p.50

사랑만큼은 아닐지라도 혁명은 시의 주된 연료이다.
사랑과 혁명은 불거진 정념情念이라는 점에서 닮았고, 시는 그것을 담기 알맞은 그릇이다.
뛰어난 연시戀詩가 대체로 시이듯, 뛰어난 혁명시도 흔히 좌절한 혁명의 시다. 혁명의 좌절은 그 주체의 불행이겠으나 시의 잠재적 행복이다. 성공한 혁명이 낳은 시는 공식주의 문학의 틀에 갇히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 점에서 1960년 4월혁명의 좌절은 역설적으로 시의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p.57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언론자유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풀리기 시작한 정치적 태엽의 동역학 속에서 쟁취됐다. 그러니,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5공체제의 제도언론에 만족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에 언론자유가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것은 지나치다. 특히 5공 시절 청와대에서 문공부를 고쳐 내려보낸 보도지침에 고분고분 순응하던 언론종사자들이 지금 정부의 언론 탄압을 운위하는 것은 희극적이다 못해 역겹다.

그렇지!!

p.72

표준적 규범 언어가 사용되는 지역과 위세가 약한 방언이 사용되는 지역에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뒤바뀐다. 표준어가 사용되는 지역에선 여성이 이 규범언어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반면에 위세가 약한 방언이 사용되는 지역에선 남성이 그 방언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그러나 한국어를 포함한 많은 자연언어에서, 여성언어와 남성언어는 중화하고 있는 추세다. 전통적 성 역할 분할선이 점차 흐릿해지고,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언어공동체를 촘촘히 묶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p.97


고종석. <개마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