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자(儒者)들의 논의는 사마광과 앙완석은 서로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정말로 편협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 사마광은 신법이 백성들을 뒤흔든 뒤에 나서게 되었으므로, 마치 청렴한 관리가 탐욕스러운 관리의 뒤를 이어 쉽게 청렴하다는 이름은 얻은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온 천하가 지금까지 그를 칭송하니 좋은 팔자라 하겠습니다. 구법을 바꾸는 것은 지극히 어렵지만 신법을 혁파하는 것은 극히 쉬운 법입니다. 어찌 사뫄광의 재간이 왕안석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광 논쟁에 대해 좌의정 채제공)
p.250
요컨대 정조는 경장이라는 용어 자체를 꺼리는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참으로 유익함만 있다면 옛날에 없던 일이라도 단연코 시행(정조실록)"하려 했던 개혁적 정치가였다. 그는 특히 송 신종과 왕안석을 재평가 하면서 경장 긍정론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대대적인 경장을 추진하겠다는 국왕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자 경장론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사대부들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p.250-251
정조는 앞의 '정계개편'을 단행하면서 채제공에게 "백성이 원하는 정치"를 위해 "거침없이 진입할 것"임을 말했는 바, 이는 행차 도중에 백성을 직접 만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즉 이번의 화성행차에서 상언 127건을 판하하는 것을 비롯하여, 그 이전에도 경기도 일대의 왕릉을 참배하면서 백성들의 각종 상언과 격쟁을 허용하여 억울함을 청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민의상달의 정치를 구현하려는 정조의 이 같은 전향적인 자세로 인해 정조시대의 상언, 격쟁은 그 양과 질의 측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에 정조는 재위 24년 간 총4.427건의 상언, 격쟁을 접수, 처리하여 역대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정조시대의 상언, 격쟁은 새로운 면모를 보였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위외격쟁(衛外擊錚)"의 허용과 백성의 고통에 대한 상언의 허용, 각종 윤음에 언해본을 첨부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우선 정조는 영조시대까지 '상언, 격쟁이 남발'된다는 이유로 금지되어온 위외격쟁을 허용하였다. 위외격쟁이란 능행처럼 국왕이 교외로 이동할 때 징을 쳐서 억울함을 알리는 행위로서, 군졸이 시외하고 있는 위내(衛內)에까지 돌입하여 감행하는 위내격쟁과 대조를 이룬다. 정조는 즉위 직후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위외격쟁을 허용하라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즉 재위 원년에 정조는 "선조(英祖)가 궐내에서 격쟁하는 것만 금하였는데, 이후 교외에서도 격쟁하는 것이 아울러 금지되고 있으며, 심지어 잡아 가두어 형벌을 가하기까지 하니 이 또한 괴이하다. 국왕이 대궐에 있을 때는 차비문에서 격쟁하며, 동가시에는 위외에서 격쟁하는 것이 옛 법"이라고 하여, 위외격쟁의 허용을 명하였다. (<일성록>. 정조 1년 1월 20)
p. 328-329
정조는 특히 화성행차 등 각종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말을 듣고, 민폐를 적극 해결하려 하였다. 정조시대는 유난히 국왕의 행차가 잦았는데, 그는 재위 24년 간 70여회나 경기도 일원에 산재한 왕릉을 찾아 나섰다. 국왕이 민정을 살피고 민의를 알기 위해 궁성 밖을 나오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는 '시민(市民)' '향민(鄕民)' 등으로부터 의견을 듣기 위해 자주 궁성문이나 도성문에 임하였다. 영조가 이처럼 도성 안 또는 도성문에서 백성들과 만난 데 비해, 정조는 주로 도성 밖으로 나와서 백성들의 소리를 들었다. 또한 즉위 이후 3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대민접촉을 시도한 영조와 달리 정조는 즉위 초반부터 대민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정조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대민접촉을 시도한 것은 왕세손으로서 영조의 국정운영을 보좌하면서 일찍이 그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세손으로서 1765년(영조 41) 명릉 배알 때 영조를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관료들의 중간 왜곡 없이 직접 백성들의 말을 들으려 하였다. 이는 임금과 백성 사이에서 국왕의 덕의를 왜곡하고 "중간에서 소멸시켜버리는" "탐오하고 교활한 관리"들을 제거해야만 성왕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의 정치관에서 비롯되었다.
p.330-331
정조는 역대 어느 국왕보다도 지방정치 상황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어사를 적극 활용한 임금으로서, 어사 파견을 통해 지방지배의 강화와 '읍폐, 민박의 파악'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고 하였다. 즉 암행어사의 활동범위를 확대시켜서 수령의 부정과 비리를 폭넓게 감찰할 수 있게 하되, 선정을 베푼 수령들을 적극 보고하게 하여 중용함으로써 국왕의 지방통제력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p.351-352
박현모 <정치가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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