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5/2007 10:38 am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민중중이 말하기를,"도하(都下)의 무뢰배가 검계를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습진(習陳)합니다. 시정이 이 때문에 더욱 소요하여 장래 대처하게 어려운 걱정이 외구(外寇, 도둑)보다 심할 듯 하니, 포청을 시켜 정탐하여 잡아서 원배(遠配)하거나 효시(梟示)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신여철에게 명하여 각별히 살펴 잡게 하였다.
- <숙종실록> 10년 2월 12일
서울 시내의 무뢰배가 결성한 검계가 습진을 하여 서울 시민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말이다. 습진이란 진법을 익히는 훈련이므로 군사훈련을 뜻한다. 정식 군사도 아닌 무뢰배 조직이 군사훈련을 하니 일반 시민들이 불안해 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도대체 이 기록에 등장하는 문제의 검계란 무엇인가? 다시 숙종 때의 기록을 보자.
좌의정의 보고가 있고 난 뒤 임금의 명으로 포도청에서 검계도당을 체포한다. 그 결과를 2월 18일 다시 민정중이 보고하는데, 포도청에 갇힌 검계 도당 10여명 가운데 '가장 패악한 자'는 칼로 살을 깎고 가슴을 베기까지 하는 등 그지없이 흉악한 짓을 한다. 자해는 조폭문화의 대표적 특징이 아닌가. 영화 <투캅스>에서 조사를 받던 깡패가 벌인 자해소동을 상기해 보라. 어쨌든 민정중은 이들을 느슨히 다스릴 경우 그 무리가 불어날 것이고 그 결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걱정이 따를 테니, 우두머리를 중법(重法)으로 처결하고 붙좇는 무리는 차등을 두어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p.260-261
민정중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무리를 모을 때 그 사람이 착하고 악한 것을 묻지 않고 다 거두어들였으므로, 여느 때에는 형세에 의지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상여를 맬 때에는 소란을 피우면서 다투고 때리며 못하는 짓이 없으며, 또 도가(都家)라 하여 매우 비밀하게 맺어서 망명(亡命)한 자를 불러모으는 곳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향도계의 관리조직인 도가 내부에 존재하는 검계다.
도가란 어떤 조직에서 중추를 이루는 관리 센터를 말한다. 그런데 향도계의 도가는 망명하는 자, 곧 죄를 지어 법망을 피하려는 자들을 거두어 숨겨주는 소굴이 되었던 것이다. 이 도가 내부의 비밀조직이 바로 검계였다.
숙종은 한성부에서 향도들을 군정(軍丁)에 채우고 조례를 세워 폐습을 고쳐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른다 (<숙종실록> 10년 3월 22일). 이상에서 소개한 것이 유명한 검계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역사학자 정석종 교수가 민중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하여 비상하게 주목받은 바 있다.
하지만 나는 검계를 민중 저항과 연결시키고 싶지 않다. 사실 검계는 그렇게까지 거창한 조직이 아니었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조야회통>과 연관지어 다시 한 번 꼼꼼하게 검토해보자. <조야회통>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갑자년에 왜(倭)의 국서가 온 뒤로 소란이 날로 심해져 동대문으로 나가는 피난민의 가마와 짐이 꼬리를 물었다. 무뢰배들이 모여들어 계를 만드니, 혹은 살략계(殺掠契)라 하고, 혹은 홍동계라 하고, 혹은 거게라 하였다. 어떤 때는 중흥동(重興洞)에 모여 진법을 익히는 것 같이도 하였다. 간혹 피난하는 사람을 쫓아가 재물을 빼앗기도 했는데, 어떤 경우 사람의 목숨을 해치기까지 하였다.
(2) 청파(靑坡) 근처에 또 살주계(殺主契)가 있었는데, 목내선의 종(奴) 또한 가입하였으므로 목내선이 즉시 잡아 죽였다. 좌우 포도청에서 7~8명을 잡아서 살주계의 책자를 얻었는데, 그 약조에 '양반 살육','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무리는 모두 창포검(蒼蒲劍)을 차고 있었다. 우대장 신여철은 관대하게 용서한 적이 많고, 좌대장 이인하는 자못 엄하게 다스렸다. 적당들이 남대문 및 대간의 집에 방을 걸었는데, "만약 우리가 모두 죽지 않은다면, 끝내 너희 배에다 칼을 꽂고 말리라"고 하였다.
(3) 광주에 사는 과부 한 사람이 피난하다가 길에서 적한(賊漢) 일곱 명에게 잡혀 강간을 당했는데, 적당을 잡고 보니, 그 중 하나가 과부의 서얼 사촌이었고 검계의 당원이었다.
(4) 교하의 깊은 산골에 시골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한 사람이 "장차 난리가 일어나면 우리도 양반으로 마누라를 삼을 수 있다"고 하자, 숙수(熟水) 개천(開川)이란 자가 큰 소리로 "듣자니 양반의 음문은 아주 좋다는데 이제 얻을 수가 있구나"하였다. 그 말을의 양반이 이 소리를 듣고 50대의 볼기를 쳤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광주의 적한과 함께 목을 베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5) 광주의 적당을 잡아 심문할 때 청탁의 편지가 분분히 날아들자, 과부가 날마다 관문(官問)에 와서 울부짖었다. 적한이 사형되자 과부도 목을 매어 죽였다.
p.262-264
그렇다면 검계는 숙종 때의 소탕으로 소멸되었을까? 뜻밖에도 검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조야회통>의 기록과 동일한 내용이 홍명희가 쓴 <비밀계>라는 글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원자료는 아니고, 이원순의 <화해휘편>에 담긴 내용을 전재한 것인데, 모두 <조야회통>과 같고 끝부분에 다음 내용이 첨가되어 있는 것만 다르다.
검계는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말썽을 피워 포도대장 장붕익이 그들을 다스렸다. 검계의 당은 모두 칼자국이 있는 것으로 자신들을 남과 구별했기에 몸에 칼자국이 있는 자를 모두 잡아 죽이자, 마침내 검계가 사라졌다.
영조대에 와서 검계가 다시 소란을 피우자 포도대장 장붕익이 일망타진했다는 내용이다. 이 자료를 기록한 자는 숙종대의 검계와 영조대의 검계를 동일시하고 있다.
p265-266
강명관. 푸른 역사.
'그룹명 >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가 정조(2) (0) | 2011.11.07 |
---|---|
정치가 정조(1) (0) | 2011.11.07 |
조선의 뒷골목 풍경 (0) | 2011.11.07 |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2) (0) | 2011.11.07 |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1) (0) | 2011.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