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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정조(1)

by 소금눈물 201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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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에 있어서 권도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임시적 정당성을 갖는 행동 규범으로서, 일반적 행위 원칙인 경도(經道 = 常道)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삼강. 구법과 같은 일반화된 예나 법 규정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경도와 달리, 권도는 위기시의 구체적인 행동규범인 것이다. 즉 예나 법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그 근본 취지가 왜곡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경도를 뛰어넘는 행위도 용납되는데 이같은 상황적 행동규범을 권도라 부르는 것이다. 예컨대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서 건져주는 것은 권도"라는 망자의 말은 권도의 상황성과 탄력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p.38


사도세자는 또한 노회한 영조 자신과 달리 신하들의 정치적 책략을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노론세력을 견제할 만한 현실적 힘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진 듯하다. 따라서 그대로 왕위에 물려줄 경우 "범이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부는 (사도세자의 시) 것"과 같은 일대 정변이 초래되거나, "국가와 종사의 위태로움이 경각이 닥칠 것"으로 판단하여 "한때의 권도를 행하여 만세의 대통을 잇게" 하였던 것이다.


p. 44


정조는 일찌기 사도세자 사건(임오화변)에서 "개인으로서 말할 수 없는 애통한 마음"을 경험하였다. 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사도세자)를 죽이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한" 채 평생을 "돌아갈 곳 없는 곤궁한 사람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정조는 영조가 "삼종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을 이을 수 있는 자신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제거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자신을 표현하여 "하늘을 꿰뚫고 땅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홍재전서> 권 16 현륭원지)
등극 이후에 정조의 가장 큰 내면적 고통은 조화될 수 없는 두 가지 윤리, 즉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선대왕과의 약속(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과 사도세자 원수의 처단(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도리)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의의 윤리와 효친의 윤리가 대립될 때 효친의 문제를 우선시하여 정치로부터 퇴장할 수 있었던 몇몇 사대부들과는 달리 충의의 문제를 우선시할 수 밖에 없었던 왕의 특수한 처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p. 45-46


돌아보건대 지금 사도(師道)의 책임이 나에게 달려있다. 무릇 사문(斯文)에 관계된 일에 있어서 그 의리를 참작하여 헤아리고 의문(儀文)을 재단하여 절제하는 것이 자연 알맞은 바가 있으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다만 복종하여 따르기만 하면 될 터인데 감히 스스로의 의견을 세워 쉽사리 이야기하였다. 그처럼 무식하고 교화를 가로막는 무리가 어찌 감히 사문의 대일통(大一統)이 위에 달려 있는 때에 입을 놀린단 말인가.[...] 주자가 예악형정(禮樂刑政)으로 교(敎) 자의 뜻을 풀이하였으니, 예악으로써 가르치되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부득불 형정으로써 가지런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師道)요 군도(君道)이다. [...]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군사의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무릇 인재를 양성하고 교도할 방법에 대하여 항상 마음을 써왔는데, 이내 이처럼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무리가 있으니 이것은 조정(朝廷)의 책임이다. [...] 오늘날 조정에 누가 능히 덕을 지니고 있는가. 내가 장차 살펴볼 것이다.

라고 하여 "사문의 대일통(大一統)이 위에" 있다는 것과 "군사(君師)의 존귀함"을 모르는 "무식한" 무리들을 "형정으로써" 다스릴 것임을 밝혔다. 특히 정조는 "사문(斯文)에 관계된 일"과 "교화"하는 일, 그리고 "인재를 양성하고 교도"하는 일이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여 사림의 역할과 권한의 범위를 축소시켜버렸다. 종래 정국운영의 주재자이자 도통 계승의 중심자로서 사림(또는 산림)의 입지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치와 학문 영역의 중심 행위자로서 국왕의 위상이 천명될 수 잇었던 것은 정조 자신의 학문적 탁월성과 함께, 각종 경장정책으로 왕권이 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p. 170-171

정조는 군사의 위상을 적극적인 존재로 재해석하여 자신의 재량권을 확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종래의 성학론적 관점에서 사대부들이 '임금이기 이전에 스승으로서'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정조는 원시유학의 이념을 근거로 '스승이기 이전에 임금으로서' 재량권을 가진 존재로 군사(君師)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한편, 유학적 지식에 있어서 자신이 어느 사대부보다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재야 산림을 비롯한 국왕 견제세력을 위축시키곤 하였다. 특히 그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비판이 용납되지 않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전환시킴으로써 국왕의 위상을 절대화하려고 하였다.

p.172-173


이러한 사대부들의 반발은 역설적인 것으로서 종래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였던 군사론이 정조의 경우 오히려 왕권절대성의 논거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국왕의 학문적 능력이 열등할 때, 국왕에게 '군사가 되라'는 말은 국왕의 입지를 제한하고 왕권을 약화시키는 요구조건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학문적 능력이 신하를 포함한 어느 사대부보다 출중할 경우 '군사가 되라'는 말은 오히려 왕의 입지를 넓히고 왕권을 강화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특히 정조처럼 명실상부한 군사로서 능력을 가진 임금이 출현하여 군신관계보다 사제관계의 윤리를 강조할 경우, 군사론은 자칫 절대왕권론의 논거로 이용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국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신하들의 비판과 저항이 정당화될 수 있지만, 정조 당시의 분위기에서 스승에 대한 제자의 비판이나 저항은 거의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p. 174




박현모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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