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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매화도>- 손융

by 소금눈물 2017. 6. 16.

 

 

 

일전에 친구가 선물해준 중국 역대 매란국죽 명화집이다.

중국의 문인들이 사랑했던 소재인 매란국죽은 중국 삼대 화재라 했다.

이 문인화 중에서 아름다운 명화들을 골라 묶은 화보이다.

눈먼 이의 안목으로도 첫장부터 감탄을 금치 못하는 명작들이다.

초기에는 채색작품으로 시작했다가 송대 이후에 점차 문인화가들이 사랑하고 표현하는 화제가 되었는데  문인들이 심상을 드러내는 먹으로 그린 그림의 화재로 사랑받으면서 채색없는 수묵으로 표현되는 그림이 많아졌다.

매,란,국,죽을 일컬어 사군자라 하며  매란국죽이외에 송죽을 더하며, 매화와 소나무, 대나무를 세한삼우라 칭하게 된다. 이후 문인화는 명대를 거쳐 특히나 원대에 이르러 문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편견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元을 생각하면 칭기즈칸, 몽고, 고려침입, 유럽를 공포에 떨게 했던 말발굽소리- 같은 것만 연상되는데 문인화가 꽃피웠던 시기가 원대라는 것이 놀라웠다(무식의 소치다 당연히). 문인화의 대표작가라 할 이들이 우르르 쏟아지는데 梅痴, 梅花道人- 이런 칭호들을 듣자니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던지 짐작이 된다.

 

아껴 보느라고 이제 겨우 후르르 책장을 여는데 그 중에 벌써 내 눈에 딱 꽂힌 작가.

 

명대의 손융隆이라는 작가이다.

우리에게 소개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화보를 더듬더듬 읽어보며 짐작할 뿐인데 생졸년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15세기에 활동했으며 시를 할줄 알고 산수, 화조를 잘하고 특히 매화도에 뛰어나 손매화라 불리웠단다.

 

 

매화도를 보자니 생각나는 책이 있다.

내가 늘 사랑하던 책 중에 해방 후 화가이며 미학자였던 김용준이 쓴 <근원수필>이다.

근원 수필 중에서 내가 또 가장 사랑하는 대목이 바로 매화讚이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 그 수묵(水墨)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墨痕)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구름같이 피었다'는 말을 이 그림에서 본다.

 가지가 힘이 있게 휘몰아쳐 올라가고 만분매화가 화면 가득찬 게, 묵맨데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함께 있는 채색 홍매화도 아름답지만, 근원의 저 글귀는 묵매화에 더 어울리는 듯 하다.

눈송이인듯, 꽃보라인듯 화면 가득 피어난 매화구름이 꿈결처럼 아득하고 아찔하다.

 

 

 

같은 이의 그림인데 이것은 또 어떠한가.

 

완자창 위로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고요히 피었다- 의 경지인 듯 하다.

화려한 색감을 치우고 담담하게 그려낸 매화도인데, 극도로 절제시켜버린 매화나무 가지 옆으로 달그림자 지나가듯 휘엉청 꺾어지는 가지 사이로 피었다 끊어지고 다시 벙그러진 꽃송이들이 모르는 이의 눈에도 찬탄이 절로 난다.

 

밤이라면 달빛이 있을 것이고 낮이라면 새가 찾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화폭에는 단지 한 가지의 매화 뿐이다. 배경을 아예 없애버려 매화 중동 한 가지 사이로 넘나다는 청량한 향이 화폭 밖으로 퍼질 것만 같다. 힘있게 끊어 꺾어간 가지의 역동적인 힘과 호선을 그리며 퍼진 가지 끝에 매달린 꽃송이들, 건강한 남성미와 우아한 여성미가 함께 어우러지니 과연 명품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몇년 전에 끄적다 미뤄둔 소설과 마친 중편 하나가 온통 흩어지는 매화꽃잎으로 분칠을 넘치게 하다 욕을 어지간히도 들었더니, 못 마친 글은 언제나 쓰려나, 써지기는 하려나 문득 어이가 없네.

 

여영의 어미가 죽던 날, 화톳불이 담장을 넘실거리던 그 밤, 매화가지 몇 개가 달빛에 흔들리던 조대감네의 어둑한 집안과, 창이 운정을 업고 불일암을 찾아가던 그 달밤도 생각나고.

 

한희원 작가의 매화도도 다시 보고 싶고.

 

아하...

 

좋은 그림은 이렇게 한숨을 불러일으킨다.

 

손융이여. 손매화여.

어찌 그대의 귀한 발걸음이 이 무식한 이의 눈에 들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