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는 늘 나를 흥분하게 한다.
전시의 질도 그렇고 사설 미술관의 전시와는 다른 묵직한 감동이랄까. 그리고 일단 싼 관람료도 매력적이다.
이만한 전시에 관람료 오천원이라니. 이런 건 정말 봐줘야 한다.
조선미술사에서 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던 정조시대 근간 활동했던, 우리 귀에 익숙한 화원들의 작품과 더불어 문인화 보물들이 쏟아져나왔다.
강력한 신분제가 흔들리고 능력있는 서얼이 중용되고 자본을 확보하게 된 중인계급이 미술,문화계로 눈을 돌리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치장하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가진 그들이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시서화의 아름다움을 찾게 된다. 또한 양반들의 계화를 따라하면서 화폭속의 그들도 자신감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바야흐로 허울좋은 양반의 명예가 전부가 아니고 돈의 힘이 결코 그보다 못지 않다는 자긍을 드러내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만천명월주옹- 강력한 왕권과 현왕을 자처하던 정조의 프라이드와 그 시대 지성사를 이끌던 백탑파들의 기운이 작품마다 넘쳐난다. 왕조가 안정되면서 오랫동안 꿈꿔왔던 화성천도를 기획하던 정조, 한양과 화성을 오가는 그림과 지도들 속에서 한참 전에 끄적였던 <풍죽도>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웠다. 삽화로 썼던 그림들을 실제로 보고 느끼는 감격이란! 단원과 혜원의 속화들과 기록화에 남은 그 시절 그리운 이름들...
지난 여름, 간송전 <단원, 혜원 풍속인물화>전의 감동을 다시 떠올렸다. 슬그머니 들어온 춘화들도 재미있고 (역시나 동서고금, 아무리 시대가 엄혹하여도 인간의 춘정이란 막을 수 없는 본성인 것을.), 이정명의 책 <바람의 화원>에서 만났던 두 화원들의 명작을 눈 앞에서 만나는 행복도 컸다.
색의 현란한 아름다움은 역시 혜원이겠지만, 상대적으로 단조롭고 담백한 색감을 화면밖으로 확대되어 뻗어가는 운동감은 역시나 단원이다.
같은 표정을 가진 사람이 없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화면 밖의 관람자들과 공감하는 단원의 그림들은 명불허전이다.
저자거리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는 별감과 중인들, 전모를 쓴 기생의 나들이, 맨살을 드러내놓고 거나하게 잔술을 마시는 중년의 사내와 삶에 지친 주모의 얼굴, 손님들을 시중드는 기생집에서 아기를 달래는 기생어미ㅡ 화폭 속의 얼굴들을 들여다보노라니 어쩌면 단원과 혜원이 가장 사랑한 것은 조선의 얼굴들, 그 민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근엄한 양반의 초상화나 이상의 선비들이 고담준론을 나누는 무릉의 세계를 그렸던 이전의 그림들과 달리 우리 얼굴, 저자에서 만나고 스치가는 그 얼굴들을 사랑했던 두 화원.
그리고 그 스승이었던 강세황 정선, 그리고 장승업과 안중식- 절정에 올랐던 조선미술사가 저물어가는 제국, 격의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들과 지사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홍매백매>로 유명한 조희룡의 대작들과 장승업의 작품이 여러 점 나와서 전시실을 떠돌면서도 매화향에 담뿍 취할 수 있었다.
급격한 근대화를 거치면서 서양화 기법이 등장하고 전쟁을 거치면서 화가들의 초상화속에 스며든 암울하고 답답한 시대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감출 수가 없고..
아 내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근원수필>의 주인공 김용준의 초상화를 직접 만나게 된 것도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리고 또, 기대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으니
동시대 활발한 한중일의 교류의 흔적들, 백탑파 사람들이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귀에 남은 연경 <유리창>의 모습을 그림으로 만나는 건 기대치 않았던 즐거움이었다.
며칠전에 전시가 끝나서 원작은 귀국하였지만 원작의 향기가 그대로 남은 뛰어난 복제화로 <청명상하도>,<태평성시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좋았다. 중국 청조, 강희,옹정, 건륭- 가장 융성했던 청조의 자부심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청명절 소주의 운하를 따라 번화한 도심과 안락하고 평화로운 시골풍경과 어촌의 풍정들이 화권의 형식으로 그려져있다. 잔잔한 물결 위에서 듬뿍 고기를 잡은 흥겨운 어선들과 그 어선을 뭍으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 절에 참배드리러 간 사람들, 이층 누각이 줄지어 늘어선 도심에서 물산은 넘치고 교역하는 사람들은 바쁘고 풍요롭다. 관리와 내관들이 오가고 결혼잔치가 벌어지고 연무장에서는 무예를 닦고 아이들은 마을에서 연을 날리고 강가에서는 발가벗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 장면 하나하나가 이야기가 되고 흥겨운 소설이 몇 권이나 풀어질 듯한 풍경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은 재미난 그림이었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다보니 가까우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와 정서가 화풍 속에 보인다. 담담하고 너그럽고 순한 조선의 풍경들, 화려하고 꼼꼼한 중국의 풍정, 그리고 농담이나 여백을 주지 않고 그 사물에 부여된 색을 도상학의 원칙처럼 그대로 그려진 일본의 풍경화들, 비교해보며 차이를 생각해보는 감동도 있었다.
욕심대로 보자면 하루 종일이라도 잡고 싶으나... 폐관시간 가까이까지 보면서도 원대로 다 누릴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조만간에 무하 전시를 보러 서울에 올 때 다시 박물관에 와 봐야겠다. 그때는 어떤 작품들이 올 지 자못 행복한 기대다.
포토존으로 설치된 한양도성도.
저기 어디쯤 조선의 그 사람들이 바삐 오갔을까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김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조선의 화원들.
별감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지나간 북촌 골목, 초옥 사랑방에서 시서화를 펼쳐놓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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