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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이반 뇌제와 죽어가는 그의 아들> 일리야 레핀

by 소금눈물 2015. 4. 21.

 

 

 

오늘은 미술사에 등장한 아버지 중 가장 잔인하고 비참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엄청나게 길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으니 잡글에 시간을 뺏기기 어렵거나 피곤하신 분들은 패스해주세요.

'아버지'를 주제로 한 그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그림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그림이지요. 훌륭한 명작이예요. 그런데도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건 너무 복잡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얼키고 설켜서 이 그림의 배경이 몇 줄 글로 쓰기엔 제가 감당할 여력이 안 된다는 거지요.ㅜㅜ

피해가기엔 너무나 드라마틱한 장면이기도 하고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주제라 결국 끌고 와 버렸습니다.

 

일리야 레핀은 지난 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로 이 폴더에 등장했지요. 제정러시아 말기 이동파 리얼리즘 화가로 이름난 작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위대한 화가에 대한 설명보다는 이 그림에 대한 배경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아요.

 

이반4세는 오늘날 러시아의 기틀을 만든 위대한 황제로 '짜르'라는 호칭을 남긴 사람입니다. 러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이 말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1530년 바실리2세와 두번째 황비 엘레나 사이에 태어난 이반4세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군이자 위대한 황제로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반4세가 태어날 때 하늘은 뇌우가 쳐서 이 불행하고 잔인한 황제의 앞날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가 이반뇌제로 불리게 되는 시작이지요.

 

그는 축복받은 왕자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혼이 허락되지 않은 러시아 정교 율법은 불임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첫째 황비를 두고 황비에 오른 엘레나를 인정하지 않았지요. 총주교는 '이 결혼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러시아는 이 사악한 아들로 인해 온 러시아가 피로 강물을 이룰 것이다'는 저주를 하지요.

꿈에도 고대하던 후계자를 얻은 기쁨도 잠시, 바실리황제는 겨우 세살이 된 황자를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 당시 황실에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이가 없고 대공과 여러 귀족들이 서로 견제를 하며 권력을 다투던 시기였습니다.

어린 황제를 업고 어머니 엘레나황비와 그 외척이 정국의 주도권을 갖게 됩니다. 당연히 다른 가문과 귀족들이 반발을 하게 되었지요. 엘레황비는 결국 이반 4세의 나이 열 살때 반대파에 의해 독살됩니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어머니가 독살되는 것을 본 어린 이반 황자는 귀족들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맹렬히 공부하며 몇 번이나 시도된 암살의 위협을 넘기고 드디어 열 여섯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때 자신을 온 러시아의 황제- 짜르라고 지칭하게 됩니다.

황제에 오른 이반4세는 아나스타샤 자하리나 로마노바라는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을 황비로 선택합니다.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고 독살된 어머니에 대한 충격으로 거친 성정이 더더욱 포악하고 불안한 황제를 황비는 잘 다독거려주고 훌륭하게 내조를 하지요. 슬하에 3남3녀를 낳았지만 생존한 것은 아들 둘이었습니다. 행복한 결혼으로 인해 이반4세는 현명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입니다. 귀족들이 독점한 권력을 빼앗아 국민들에게 돌려주었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실력을 갖추고도 신분이 낮아 등용되지 못하던 인재를 발굴합니다. 귀족들에겐 가차없이 칼을 휘둘러 반감과 원한을 사지만 국민들에게는 당연히 인기가 있었지요.

 

그런데 아나스타샤황비와의 결혼은 14년만에 끝이 납니다. 불과 서른살의 나이로 아나스타샤황비가 수은과 비소에 중독이 되어 암살됩니다. 죽어가는 황비를 살리려고  발버둥치던 황제의 애절한 사랑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이반4세는 말 그대로 미쳐버립니다. 암살의 혐의가 있는 이들은 물론, 황비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귀족집안을 몰살해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처형방법은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수천명의 귀족과 그 영지의 시민들이 죽어나갑니다. 이들을 진압하고 강제한 이반4세의 공포정치는 이후에 러시아를 이은 소련의 독재들에게 아주 좋은 (-_-;;) 모범이 됩니다. 황제의 밀명을 받고 귀족이나 황실 사람들을 밀고하고 수많은 이들을 죽인 이반4세의 비밀정보부대인 오프리츠니크가 러시아 최초의 비밀정보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지요.

 

아나스타샤황비 사후 여섯 명의 황비를 두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황비는 황제의 기분을 거스려서 맞아죽었고, 대신과 눈이 맞았다는 혐의로 산채로 매장이 되기도 합니다. 새 황비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정국은 또 그렇게 요동칩니다. 반대파는 물론이고 자신의 측근인 대신과 장군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살해하였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원성이 자자하게 됩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공포와 의심만이 가득차게 됩니다. 황위계승권자인 아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어느날 불시에 아들의 처소를 찾은 이반4세는 임신한 며느리의 복장을 보고 분노합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시아버지의 앞에 황급히 달려나오느라 세 겹의 복장을 미쳐 갖추지 못하고 한 겹의 옷만을 입고 있었던 것이지요. 분노를 참지 못한 황제는 그 자리에서 며느리를 마구 때려 유산시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내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바실리황자의 머리를 지팡이로 마구 때립니다.광기에 사로잡혀서 미친듯이 지팡이를 휘두르던 황제가 정신이 들었을 때, 바실리황자는 피웅덩이 속에서 이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그림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리얼리즘 화가 일리야 레핀의 비극적이고 음울한 이 그림은 아주 깊고 웅장한 장편소설을 보는 듯한 감동이 입니다. 아니 소설이 아니라  무서운 연극 무대를 보는 듯도 합니다.

 

화면은 붉은 카펫으로 꽉 차 있습니다. 지금까지 황제가 많든 수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아들이 만든 피처럼 붉은 방입니다. 화려한 황실의 장식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마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듯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살육이 벌어진 순간의  공포와 적막감 뿐입니다.

이 잔인한 현장과 맞닥뜨린 관람자의 발도 굳어있습니다. 희미한 촛불이 일렁이는 방 안, 불빛이 쓰러진 황자의 옷자락을 감싼 모습을  숨소리를 죽이고 지켜보게 됩니다.

어두운 호롱불이 일렁이는 무대 위에서, 아들을 때려죽인 비극의 황제가 굳어가는 아들의 시선을 끌어안고 독백을 하는 모습이 선연히 떠오릅니다. 자신의 손으로 왕위계승권자이자 사랑하던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회한. 죽어가는 아들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공포,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

 

 

관람자의 귀에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들을 데리러 오는 죽음의 사자를 노려보는 아버지의 공포와 아들을 향해 속삭이는 독백이 들릴 듯 합니다. 황제의 명령이다! 감히 어디를 오는 것이냐. 물러가라 너 죽음의 사자여! 러시아의 황제를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아니다. 아들아. 너를 낳던 날의 기쁨을 어찌 하느냐. 가엾은 아나스타샤, 나의 황비, 너의 어미를 너는 아직 만나서는 아니 된다. 아들아. 내 골고다여. 러시아의 짜르를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내 아들아.

 

흔들리는 불빛, 끔찍한 비극에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아버린 궁전의 그림자들. 흐르는 피, 이제 그 피는 천천히 황제의 옷깃 속으로 스미고 노인의 마른 손가락사이로 젊은 몸의 온기는 떠나가고 있습니다.

거칠게 포효하던 아버지의 비명은 식어가는 아들의 몸을 더듬으며 점차로 낮아집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잔인한 살육을 일삼던 뇌제 이반는 이제 없습니다. 머리가 허연 아비의 분명치 않은 웅얼거림, 굳어가는 젊은 몸뚱이를 끌어안고 얼어버린 노인의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아들 바실리황자는 의식불명에 빠졌으나 현장에서 바로 사망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죽어가는 아들이 소생할 것은 간절히 바랬지만 결국 황자는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반뇌제 사후  황위는 바실리의 동생 표트르에게 이어지나 그 역사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음으로  러시아 류리크왕조는 단절이 됩니다.

 

현군과 폭군의 극단을 향해 치달아간 이반뇌제.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전국을 공포정치로 다스리며 잔인한 악행을 일삼았으나 귀족들의 횡포에 고통당하던 국민들에게는 열렬한 사랑을 받기도 했던 모순의 황제.

자신의 손으로 살해했으나 죽어가는 아들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비극의 아버지.

 

일리야 레핀의 그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