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파도 너머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 햇살이 밝아오는 바다입니다. 혹은 저녁일까요.
금방이라도 작은 뗏목을 덮칠듯이 파도가 밀려오는데, 사람들로 발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찬 좁은 뗏목은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나무판자들이 떨어져나가는 가장자리로 바닷물에 흔들리는 시신들과 뗏목 위에 널부러진 시체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수평선 너머로 고함을 치며 구조를 요청합니다. 참혹한 뗏목과 사나운 바다를 살피던 관람자들의 시선이 화폭을 더듬다 문득 멈춥니다. 이 소동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아니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버린 듯 초월해버린 노인의 팔에는 파도에 흔들리는 젊은 남자의 시체가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이 몸뚱이 하나 뿐이라는 것 같은. 노인의 아들일까요...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1819년 파리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은 작품으로 1816년 실제로 암초에 부딪혀 난파된 범선 메두사 호의 참혹한 사건을 그렸습니다.
배에 탄 사람은 400명이었는데 원래 정원은 250명이었지요. 암초에 부딪히자 구명정에 탈 사람을 선장이 지정을 했는데, 구명정에서 제외된 149명은 그림처럼 뗏목을 만들어 10여일을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구조됩니다. 149명 중에서 살아난 사람은 단 15명이었고 그나마 이들 중 5명은 구조 직후 사망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표류 과정에서 겪은 충격 때문에 모두 정신이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증언한 10여일의 표류는 차마 인간이 겪지 못할 참상이었습니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급하게 얼기설기 만든 뗏목은 거친 파도에 가장자리가 계속 떨어져나갔고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산 채로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져버렸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뗏목 안쪽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이 과정에서 65명이 총으로 사살됩니다. 이틀 만에 처음 뗏목에 올랐던 생존자 자의 반이 줄어버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과 물이 부족해지자 이들은 소변을 받아먹고 시체의 살을 발라내어 햇볕에 말려먹기 시작합니다. 살기 위해 올라탄 뗏목에는 깃발처럼 줄줄이 인육이 널리기 시작합니다. 일주일을 지나면서 약한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고 죽어갔고 그 와중에 병자들은 숨이 붙어있는 채로 바다에 던져집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채 지워지지 않았을 때 다시 이 참극을 환기시킨 제리코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을 다시 한번 전률케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일 년 전에 겪은 그 사고처럼, 메두사호의 침몰은 표면적으로는 '사고'였지만 그 사고가 일어난 배후와 처리 과정은 사건이 되게 합니다.
당시 식민지확장에 혈안이 되어있던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위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식민지를 개쳑하기 위해 떠났고 이 열풍 속에 메두사호가 있었습니다. 25년 간 배를 타 본 적도 없는 퇴역 군인이 뇌물을 주고 함장자리를 얻어 이 배를 이끌게 됩니다. 그는 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뗏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죽음 때문에 동정하던 이들은,왕가에 연줄과 뇌물로 자리를 얻은 무자격자 함장의 무능과, 적정한 선객과 화물을 넘어선 과적 때문에 침몰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게 되었지요. 이 선장에 대한 재판은 부패한 왕가와 무능한 정부 당국을 심판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왕가와 정부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여론을 호도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와중에 이 작품이 살롱전에서 공개되고 금메달을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기시감이 느껴지시나요? 과적과 무능, 정부의 은폐,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살고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생존자의 운명...
배는 난파되었지만 선장과 고급장교, 귀족,부자들은 최우선으로 구명정에 올라 타 목숨을 구합니다. 가까스로 뗏목에 올라탔지만 그 중에서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또 바깥쪽으로 밀려나 맨 먼저 생명을 잃게 됩니다.
살코기를 탐하는 생존자들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시신을 지키고 있는 늙은 아버지는 화폭을 마주 선 관람자들에게 묻습니다.
내 아들은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당신들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나요? 당신들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실 건가요?
파도에 흔들리는 이 작은 뗏목에서 나는 끝내 살아남을 지 죽을 지 알 수 없으나 살아있는 당신들은, 당신들은 이 배에 오르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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