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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규장각

21회. 얼굴들

by 소금눈물 2011. 11. 7.

:55 pm공개조회수 0 2



가을은 홀로 가을이 된 것이 아니라 가을과 겨울과 봄과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된 것이다.
하여 가을 풍경 안엔 눈에 보이는 가을의 빛깔 뿐 아니라, 사계절의 빛이 모두 담겨져야 한다.
먹 만으로 그린 네 그림엔 그 사계절의 빛이 모두 담겨있다.
예로부터 먹빛은 모든 색의 기본으로 우주를 품은 색이라 하였다. 그 먹빛을 잘 살려낼수만 있다면 화려함은 담을 수 없어도 깊은 뜻은 담을 수 있지.
우리가 이 아이의 그림을 5등으로 뽑은 것은 비록 채색은 없었으나 붓질의 선매와 필묵의 변화무쌍한 기법이 쓸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먹빛으로 계절의 이치까지 담아냈으니, 난 이 아이에게 5등이 아니라 1등인 갑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계집이 그림을 그린다 하여 별일이라 여겼는데 난 여기에 와서 참으로 놀라온 별일을 보고 가는 구나.

신분과 성별을 가르지 않고 그림 그린 이의 마음과 눈을 보아준 도화서의 노화원들.
이 따뜻한 가르침을 송연은 평생 마음에 새기고 걸어야 합니다.
비로소 송연의 그림은 공식적인 인정을 얻었고 이처럼 과분한 상찬을 상으로 받았으니 간직만 해온 그 높은 꿈을 마음껏 펼쳐야겠지요.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리는 그림. 다른 이를 의식하면서 잃어버린 스스로의 그림.
이제 송연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먹빛만으로 자연의 영고성쇠를 그리는 화안(畵眼)을 갖게 된 송연.

이 기쁨을 누구에게 먼저 알리고 싶을까요.
귀한 붓과 책을 주며 의기소침한 자신을 채찍질해주었던 그 분.
송연은 그립습니다.




송연이가 후배다모로 들어오고 난 뒤에 초비의 나날이 참 재미있어졌습니다.
빨래도 잘 하고 심부름도 잘 하는 송연, 골탕을 먹여도 도무지 화를 낼 줄도 모르는 아이.
조금씩 심심해지려던 차에 멀쩡하게 잘 생긴 익위사 관원이 시도때도 없이 도화서를 들락거리네요.

내가 보고 싶어 온 거죠?
부끄럼쟁이 대수씨, 대놓고 초비한테 마음이 있다고 말하기가 민망해서 공연히 송연이 핑계를 대는 거죠.
아유~ 다 안다구요 ~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파지를 만들더니 송연이가 화사경합에서 쟁쟁한 수습화공들을 밀쳐내고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답니다.
장하다 송연아.  정말정말 기쁘다.
그래도 화사경합엔 병법서 같은 걸 외는 시험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래, 이제 인물도 같은 걸 그릴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나를 불러주어.
네가 그린다면 나는 하루종일이라도 꼼짝없이 네 앞에 앉아주마.
나를 조금만 꼼꼼히 봐준다면 내가 얼마나 근사한 남정네가 되었는지도 알아챌 거야.
그날이 제발 빨리 와주었으면 좋겠다 정말.



다만 동무일 뿐일게다.
설마 저하께서 그 아이에게 다른 마음을 주고 계실 리가 없어.
그런 분 아니시다.
저하께서 마음을 주고 계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게지.

혹여 그런 일이 있다 하여도 성례를 올린 지 이미 아홉 해,
아직도 기다리는 소식이 없으니 여염의 아낙이어도 송구할 일이어늘, 하물며 왕실의 여인이 되어  윗전의 근심이 되고 만 내 처지에  어찌 투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저하께 미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예를 잊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마음 깊이서 어떤 마음이 흔들린다 하여도... 아니다. 그건 내 속마음이 아니다. 진정이 아니다...




몇몇의 권세를 가진 이들, 그들을 받쳐주는 이들.
대대로 권세와 부를 누려가며 제 잇속을 차리기에만 혈안이 된 그들.
그대로 두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허나... 나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고 내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에도 간악한 모함으로 나를 옥죄니...




어린 아이라고 방심하지 마라.
그 많은 덫에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제 자리를 공고히 만든 아이다.
이제는 전하의 신임까지 얻고 대리청정을 하고 있으니, 우리의 목덜미를 조이려고 갖은 수를 다 쓰고 있다.
세손의 책사라는 홍국영.
그 놈을 세손에게서 떼어낼 방도를 찾아보시오!!




저희들이 나라일을 하느라 애쓰시는 분들의 노고에  드리는 작은 성의올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론 세손께서 대리청정을 맡으셨다는데 세정을 모르는 그 분이 혹여 우리 시전을 흔들지나 않으실지...
시전은 이 나라의 근간이옵지요.
어린 혈기로 손에 든 것이 칼인지 장난감인지도 모르는 분이 함부로 그 칼을 휘둘러 함부로 개혁이니 경장이니 하면서 세상을 흔들어 놓는다면, 이 나라는 어떤 도탄지경에 빠질지 참으로 걱정이옵니다.
설마... 조정의 대신들께서 그런 지경이 되게까지는 아니하시겠지요.
그럼요, 우리 시전을 밟고는 나라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돈은 세상의 근본입지요...
저희는 그저 작은 수고를 더해 이 나라가 바른 길로 돌아가고 종사가 튼튼해지기를 바라는 어린 백성에 불과합니다.




돈을 달라면 돈을 줄 것이고, 권세를 달라면 권세를 줄 것이오.
얼마든지 뒷배를 보아줄 것이니, 단, 먹은 만큼, 받은 만큼은 일을 해주시겠지요?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는 분들은,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천한 다모, 계집년 주제에 감히 화원이라니.
이 나라가 망하려는 게야.
네 이년!
분에 넘치는 평을 받아 네 년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게로구나.
엄격한 도화서 규율을 네가 업수히 여기지 않고는 수업시간에 이리 마음대로 들락거릴 리가 없다.
썩 나가거라!!




화사경합에서 이겼다고 호락호락 자리를 잡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기죽지 않을 거예요.
지지 않을 거예요.
이제 겨우 시작인 걸요.
마룻장 아래서든, 뒷문 밖에서든, 나는 열심히 듣고 그리며 배우겠어요.
도무지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저 넓은 중국에서는 여인네들도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화첩을 낸다는데, 조선만 그리하지 말라는 법은 옳지 않아요.
나는 조선 최고의 화원이 되겠어요.
내 꿈을 반드시 세상에 펼쳐보이겠어요.



송연아.
너는 시집같은 거 가지 말거라.
혼자 사는 게 속 편해.
조선 사내들의 가슴에 단비를 내려주는 솔거 이천이 이런 수모를 겪고 사는 지 세상은 모를 것이다.
아직 내가 강하지 못한 게야. 그렇지?
당분간은 도화서에서 그냥 자야겠다.







우리도 이제 어엿한 장사꾼이 될 수 있어.
시전놈들에게 매질을 당하며 쫓겨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만 된다면 까짓 세금, 낼 수 있어.
세손 저하 만세다, 만세, 만만세다!!





홍지평.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는 암초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이 누군 줄 아는가?
화완옹주일세.
옹주를 쳐내지 않고서는 세손의 안위를 지킬 수 없어.
자네, 노론 세력 중에서 옹주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가?
옹주는 노론 세력의 돈줄이네.
옹주를 통해 큰 돈이 들어오고 그것을 노론 세력들이 분배를 하게되지.
시전대방 오윤석이라는 자의 뒤를 캐보면 알게 될 걸세.




칠패 엿장수 괴춤을 뒤지는 것도 아니고 시전대방의 비밀장부를 빼내오라니.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겠지.
하지만 이왕 저하를 위해 이 한 몸 목숨을 바치기로 나선 박달호.
목숨을 다해 저하를 지키겠습니다~

뻥이라뇨 나으리!!



상권을 어지럽힌 난전은 당연히 한성부에서 끌고 가겠네.
허나, 자네들 역시 법을 어긴 자들이 아닌가.
난전을 단속하는 것은 사헌부의 권한이다.
난전을 사사로이 단속하는 것은 국법을 어긴 것임을 모르더냐.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들을 잡아 한성부로 끌고 가라!!




도성의 난전을 합법화하여 장사를 허락하도록 하겠다니, 그럼 시전이 세금을 내려 하겠습니까?
경제의 바탕은 시전입니다.
그들이 없이는 나라가 돌아가지 않는 법입니다.
아직 세정을 모르시는 저하께서 젊은 혈기에 하루아침에 개혁을 하시겠다는 것은 나라가 흔들릴 일입니다.




안된다니요.
시전의 세금을 낮추고 부족분을 난전에서 거두어 서로 경쟁하게 하면, 조정에는 세금이 늘어날 것이고 백성들은 싼 물건을 원하는 가격에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제껏 저들을 지탱해온 것은 경들의 곳간이 아니었소?
내가 얻은 시전대방의 비밀장부에는 그동안 시전 공가를 조작해 부당한 이득을 취해왔던 일이 소상히 적혀있다하오.
조정 고관대신들이 눈을 감아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 공과를 조작해 이처럼 참혹한 비리를 저지를 수가 있었겠소.
내 단언컨대,  분명 저들의 입을 열어 이 일에 한치의 의혹도 남기지 않을 것이오.
이 일에 연루된 대신들이 있다면 내 낱낱이 밝혀 다시는 그 전폐를 밟지 않게 할 것이오!
아시겠소!!




대책없이 당하고만 있는 노론.
대전에 들어 전하께 대리청정을 멈추어주시라 간하던 중전은, 이 또한 왕의 수업이라는 말로 밀려나버렸습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까요?

하늘높은 줄 모르고 뻗는 세손의 기세에 이렇게 뒤통수들이나 맞고 계실 건가요?
비단 그 아이가 사도세자의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아이기 때문에, 그렇게 무서운 아이기 때문에 그 아이가 여기까지 오르지 않도록 끌어내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크게 심려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저는 오히려 세손이 이리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세손의 무능을 입증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우리의 목을 죈다고 생각하는 그 칼자루가 어찌 자신의 목을 치는 지 이제 알게 될 것입니다.




한성을 뒤흔들놓은 세손의 경장을 지금까지 보고만 있던 전하.
왈왈대는 대신들에게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성 안으로 더이상 물건이 들어오지 않고 물가가 턱없이 올라 백성들이 신음하게 되자 흔들립니다.

너무 일렀던가.
너무 큰 힘을 아직 어린 세손에게 준 것인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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