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세손의 첫 대리청정 차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노론이 정말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군요.
어쩌면 지금까지의 고난은 이 자리에 앉기까지의 준비에 지나지 않았겠지요.
세손에게도, 저들에게도 이제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다음은 난전물 속공권과 난전인 착납권에 대한 사안입니다 저하.
요즘 저잣거리에는 불법으로 장사를 벌이는 난전이 성행하여, 도성의 경제질서를 문란하게 만들고 있사옵니다.
하여, 호조는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시전 상인들이 이런 불법난전을 온전히 단속할 수 있도록 난전물 속공권과 난전인 착납권을 더욱 강화하여 주기를 ..

잠깐, 잠깐 기다려 보시오.
난전물 속공권이 무엇입니까?

잘 흘러가던 호판의 말을 자르는 저하의 말씀에 의아한 채제공.
조세나 행정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아실 영특한 세손 저하께서 설마 저걸 모르셔서 물어보시는가?



허참.
모르고 막는 말씀인지, 아니면 무슨 꼼수이신겐지..
난전물속공권은, 난전상인들이 취급하는 물품을 나라에서 몰수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옵니까 저하.

그렇군요.
허면, 난전인착납권은 또 무엇입니까?


정말 모르나보네.
동궁이 지나치게 공부에 탐닉한다고 난 소문은 다 거짓이었던 모양인게야.
전하의 눈에 들고자 헛말을 퍼뜨린게지.
저런 기초적인 말뜻도 모르다니 참.

아, 그것은 불법상인인 난전을 구속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함이옵니다 저하.
이거야 원, 시강원 강학도 아니고.
호판인 내가 미욱한 세손에게 이런 말뜻이나 가르쳐주자고 그리 걱정을 했던 건지.

아아..
그런 뜻이오?


이런 세손이 아닌데.
이 차대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을지 짐작을 하는 두 사람은 세손의 아둔함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슨 꼼수인고. 무슨 짓을 하려고 저리 음흉을 떠는고.

시종일관 따뜻하게 바라보시던 전하의 표정도 굳어지셨군요.

헌데 그게 그런 뜻이라면 경의 말은 좀 이상하군요.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저하.

내가 알기론 난전의 속공권은 평시서가, 그 착납권은 한성부나 사헌부가 행사해야 합니다.
이는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사사로이 단속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진 조처가 아닙니까?

헉!

난전상인이 비록 불법장사치이나 이들은 대부분호구지책이 어려운 가난한 백성들입니다.
하여, 그런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그들을 단속할 권리를 평시서와 한성부에 이관했습니다.
그건 시전의 상인들이 사사로이 행패를 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지요.
헌데 시전상인들에게 그 권한을 더욱 강화해 달라니, 그렇다면 대감의 말은 지금도 상인들이 법을 어기고 난전을 사사로이 단속하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건가요?
게다가 대감의 말은 이 불법행위를 더욱 강화해 주자는 것이구요.

이것이었구나...
이것은 급습이다.
불법이었으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해왔던 시전의 속공권을 세손이 들이밀 줄이야.

그러면 그렇지.
네가 그렇게 아둔할 리 없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잘 하는 구나.
더구나 저들의 입을 통해 그 전말을 떠들게 하였으니 옴쭉도 못하게 잘 붙잡았다.

이상한 일입니다.
어째서 호판대감은금난전권이라는 그 막대한 권한을 시전상인에게 내어주자는 것입니까.
아니 혹, 뒤를 봐주어야 할 시전상인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 아니, 저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쉴틈도 없이 유창하게 쏟아지는 저하의 논리에 방심하고 있다가 급소를 맞은 호판은 사색이 되어 말을 이을수가 없습니다.

물론 한성부와 평시서에서 단속을 강화하라는 저하의 말씀은 일면 타당하오나, 무릇 국가의 정책과 법제란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보다 못한 이판이 나서 호판을 살려주려 하는 군요.
시전의 난전단속은 이미 오래전 부터 이어온 관행으로...

대감!
나는 지금 그 관행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오!
이판의 변명을 단칼에 자르고 들어오는 세손.

헉!

하오나 저하.
이는 주상전하께서도 오래된 관행을 이해하시고 이미 오래 전부터 윤허하신 일이옵니다.
나가떨어진 이판의 뒤를 이은 승지.
임금이신 전하도 하지 않은 일을 네가 나서느냐 막아서는 군요.

교활한 자.
불법을 가릴 수 없으니 전하의 뒤로 숨으려 하는구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으나, 임금을 연습하고 있는 세손일 뿐이지 양위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로구나.

승지까지 나서 세손을 가로막자 전하께서 나서셨습니다.
지금 국사를 보고 있는것은세손이다.
나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
비겁한 자들.
내 뒤로 숨으려 하지 마라.
세손은 게의치 말고 계속 하거라.

후겸의 방패도 깨어졌습니다.

지금 조정과 이 나라는 온통잘못된 습속으로 물들어 있소.
헌데 경들은 그것이 오래되어 바꾸기 힘들다는 말로 그 대안조차 찾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이것이 정말 바꾸기 어려운 것이오?
혹 경들은 잘못된 관행과습속을 바꿀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편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세손의 의지.
아기호랑이가 아니라 이미 다 자라 숲을 호령하는 군주가 되었음을 대신들은 깨닫습니다.
무어라 막고 싶으나 법제에 의거한 세손의 말을 막을 논리도 없거니와 믿었전 전하께서 저리 세손의 후원을 자임하고 나서시니 꿀먹은 벙어리가 될 뿐입니다.

나는 그런 부패와 잘못을 결단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나는 조정의 구태를 혁신하는 데 여러분만의 의견을 듣지는 않을 것이오.
하여, 이 시각 이후 육조와 각사의 하급 관원들에게 각 부처의 부패개혁안을 올리라 하명할 것이오.
매일 세 곳씩 그 곳에 직접 들러 저들로부터 그 일에 대해 직접 들을 것이니 도승지는 그리 알고 차질없이 그 일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설상가상!
날벼락입니다.
말사 하급관원에게 국정을 묻겠다니, 그것도 지금 "구태"로 지목된 이 대신들의 부패를 개혁할 안을 묻겠다니.


완패입니다.
세손이 이렇게 치밀하게개혁안까지 대비하고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첫 차대에서 치명상을 입은 노론, 입맛이 쓰지만 이 싸움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젠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야하겠습니다.

금난전권을 걸고 나오다니.
노론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던 그 일을 스스로 불어버려 묶여버렸으니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인의 뒷배를 봐주고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주상전하도 인정한 전례운운하며 전하의 명예까지 더럽혔으니 맞은 상처가 쓰라리기 그지없습니다.

하급관원까지대신들의 뜻에 맞추어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상대적으로조정의 일에 불만이 많고 시류에 물들지 않아 겁도 없이 세손에게 하고픈 말을 다 떠드는 날이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과연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구나.
어찌한다, 어찌 이 위기를 넘겨나간다...

이제 시작이다.
너희들이 쏘아대는 화살을 피하기만 급급했던 나.
오늘을 위해 그토록 많은 날을 서책을 뒤적이고 민의를 살피느라의대를편히하고 잠을 이룬 날이 없었다.
동이 터오는 창을 바라보며 그토록 절치부심했던 과제다.
내 백성들을 다시는 가증스런 너희 무리들의 농단에 찢기게 하지 않겠다.
너희에게 던지는 화살이면서, 내 스스로와 겨루는 싸움이기도 하다.
받으라!
내 치세의 시작을!
'그룹명 > 규장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 박달호야 박달호! (0) | 2011.11.07 |
---|---|
드라마 오솔길 산책 (1) [정순왕후] (0) | 2011.11.07 |
얼굴들 (0) | 2011.11.04 |
무서운 혼돈 (0) | 2011.11.04 |
홍국영, 다음 대의 제왕에게 배팅하다 (0) | 2011.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