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이야기들의 글 순서는 조정에서의 서열이나 드라마에서의 기여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일러둡니다. 거기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사실 저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몇 군데 책을 뒤적거리다가 조금씩 정리를 해두는 정도이고사실 "역사적 사실" 보다는 드라마에서 보는 캐릭터의 위치에서 보고 싶으니까요. 그냥 "꽂힌"대로 불러올리겠습니다. 다만 되도록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하겠으며, 나중에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아시는 분들이 정정해주실 걸로 기대하겠습니다.(이런 무책임한 인간을 봤나 )
맨 처음 올리게 되는 정순왕후.
여걸이지요.
열 다섯 어린 나이에 66세의 노인에게 시집을 가서 6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은 이 여인의 치맛자락에 휘감겨 흔들려야 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왕실 최고 어른이라는 위치를 유감없이 이용했지요.
사도세자의 비밀원행을 오라비에게알려 공론을 만들고 결국은 그를 죽게 한 것은 겨우 열 일곱의 나이.
이때 그 오라비 김귀주는 겨우 스물의 나이로, 출사를 하지 않은 서생의 신분임에도 임금에게 밀봉한편지를 올려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정휘량을 포함한 임금 측근의 탕평파 전체를 공격하여 파란을 일으키니 임금은 경악합니다.
어린나이들에 대단한 권력욕을 가진 남매였고 또 그런 집안이 아니었나 합니다.
<이산>에서, 온화한 얼굴로 내명부의 여인들을 감싸고 곤경에 처한 그들을 위로하며, 늙고 병든 남편의 앞에서는 당신만 믿고 사는 나는 어찌하냐고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자. 참소를 받는 세자, 세손을 보호해달라고 눈물로 간구하던 그 여자.
낮의 여인이 그러했다면, 밤의 여인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 엄격한 성리학의 나라에서, 치마를 두른 여자가 임금의 뒤에서 수시로 야합을 소집해서만조백관을 조아리게 하며, 보위에 있는 임금의 정치를 대신들의 언론으로 조종하며
국본인 세자를 모함으로 살해하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판서 하나 죽여버리는 건 일도 아닌 여자.
오죽하면 직접 사병집단을 만들어 육성하고 그 무리를범궐시켜 대전을 넘보는 일 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이 여인.
정말로 영조가 왕비의 전횡과 야심을 몰랐을까.
실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강력한 노론의 권세를 등에 업고 있는 왕비를 내칠 수 명분이 없었고 그럴 마음까지는 없었다고 봅니다. 왕비를 내치고 그 세력의 입을 막을 만큼 세자를 아낀 것도 아니었고 기실 자신이 그 세력의 비호로 목숨을 부지하고 왕위에 올랐으니 일정부분 배려를 해야 했고 또한 그들과 더불어 나라를 끌고 가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지나치게 나가는 왕비를 책망하고 그녀에게 완전한 신임을 주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임금이 그러거나 말거나 정순왕후는 영조의 치세에서는 표면적으로 크게 드러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그가 죽고 정조가 보위에 오르자 적극적으로 국정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오빠 김귀주를 몰아낸 홍국영을 없애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으며 왕실후계문제에도 적극 개입하여 사도세자의 서자들을 처단하려 무진 애를 씁니다. 거기에다 중전의 후사생산능력을 문제삼아 후궁을 들이게도 하지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임금 대신, 왕실 최고 어른의 입장에서 후사를 문제 삼으며 후궁을 간택한다... 사실 왕조사회에서 후사문제는 지금과 달리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강력한 왕권은 다음 대에도 선대왕의 업적과 정치철학을 이어갈 왕손이 있어야 보존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정조의 약점을 잡아서 자신이 선택한 여인에게서 얻은 후손으로 또 노론의 정신을 심어주지 않으려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거나 말거나 ㅜㅜ)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몰아 죽인 것에 만족치 않고 그 핏줄을 완전히 멸살함으로써 그 죽은 자의 죄상을 더욱 공고히 해, 혹 나중에 사도세자가 신원되어 자신들이 단죄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요. 이 일은 더욱 중요한 것이, 만일 정조의 후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신원된 사도세자의 아들들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될 지는 안 보아도 뻔히 짐작되는 일이지요.
암튼, 정조는 그 일에 대해 올라오는 상소문을 집어던지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붓기도 하며 며칠을 합문을 닫고 대항하기도 하는 등, 서제들을 결사적으로 보호하려 합니다.
어찌했든 눈물겨운 정조의 노력에도, 상계군 담을 잃어야 했으며, 그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형제 은언군을 끊임없이 흔들었지요. 귀양을 보내고, 그 귀양을 풀려는 정조에 반발하여 궁을 나가겠다 시위를 하고-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은언군의 집안을 완전히 날려버려서 한풀이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영조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짐작해보면 정순왕후는그리이스 신화의 메데이아에 필적할 인간형이지요.
살아생전, 모든 권력을 다 이루었으며 심지어는 어린 순조를 앞세우고 수렴청정으로 직접 국사까지 보았으니...
필요하여 적에게 숙여야 할 때는 최대한 낮게 엎드려 은혜를 구하고, 힘을 얻어 펼칠 때는 눈앞을 막는 작은언덕을 모조리 없애버려 화근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노인에게 시집을 간 가엾은 어린 새아씨가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권력욕으로 해결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본디 성정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젊은 임금에게 시집을 갔더라도 그녀와 그녀를 낸 집안은 여전히 그 욕망을 발산하고 국가를 흔들어버릴만한 재목이 아니었을지.
제 감정을 넣어 살려내어 그녀의 마음을 짚어내고픈 마음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저 같이 소심하고 남들의 이목에 늘 신경쓰는 인간들에게는, 어둠처럼 깊고 불처럼 뜨거운 그녀의 속마음이 쉽사리 잡힐 리가 있겠습니까.
편전에서의 그 한없이 여린 어린 중전의 모습, 궁 후원에서 마주치는 그 속깊고 다정한 미소, 비밀회합에서 보이는 싸늘하고 굳은 카리스마.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정순왕후의 얼굴이었을까요?
전 교태전 보료에 앉아있을 때 보이는 그 얼굴이 아닐까 합니다. 늘 고개를 빳빳이 하고 정면을 응시하며속마음을 짚어내기 어려운 굳은 표정의 여인.바로 그 굳은 표정이 이 여인의 참마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오직 사대부 남자들만이 자신의 말을 하고, 자신들의 꿈을 만들어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치마를 두른 여인으로 태어나 그 남정네들을 발끝 아래 두고 마음껏 휘두르며 남김없이 욕망을 다 발휘하고 떠난 여인의 그 차갑고 굳은욕망의 모습 말입니다.
왕비의 머리에 꽂혀진 소립봉잠을 볼 때마다, 그것을 만든 장인을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겁니다. 왕비마다 저 소립봉잠을 꽂았을 것이나 그녀만큼 그 힘을 마음껏 과시한 이도 드물었을테니까요.
그룹명/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