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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낡은 서고

지금 비록 너희곁을 떠나지만

by 소금눈물 2011. 11. 24.

10/06/2004 11:53 pm공개조회수 1 9



그분은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외모를 하고 계셨지만 그 웃음만은 정말 소년같았다.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왼손 둘째손가락으로 슬그머니 쓸어올리며 열강을 하다가, 문득 말을 딱 멈춘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서 선생님을 바라보면, 골똘하게 무슨 생각에 잠긴듯 멈춰있다가 느닷없이 앞에 있는 아이를 일으켜세운다.
얼떨결에 일어난 아이가 상황을 짐작못하고 쭈빗거리고 서 있으면
가만히 그애 얼굴을 들여다보던 선생님.

"니 아부지 이름 뭐냐?"

그랬다.
그런 분이셨다.
종잡을 수 없는 기인같기도 하고, 더할나위없이 따뜻하면서도 어린 우리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이해해주면서 제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동료선생님으로부터도 "존경"을 받던 분....초당 이종록 선생님..
내 중학교때 국어선생님이셨다.
힘주어 판서를 하는데, 그 글씨는 꼭 초서체처럼 휘면서도 힘이 듬뿍 담겨있어서 판서가 저렇게 멋질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 년 열 두달을, 여름양복, 겨울 양복 달랑 그렇게 두벌로 버티면서 낡은 자전거를 탈탈 타고 다니던 시골학교 국어선생님..지금 생각하면 이십대 후반의 젊고 젊은 나이였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깊고 따뜻한 인품을 갖고 계셨을까..
목소리 드높여 무엇을 주장하는 분은 아니셨지만, 그분이 거기 계심으로 해서 돌아가는 팽이처럼 뛰어놀던 우리가 언제든지 달려가고 싶게 든든하고 따뜻했던 선생님...


이 책을 지은 시인은, 이땅을 눈물로 넘실거리게 한 애절한 연시집 <접시꽃 당신>의 주인이지만, 그의 시힘이 더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시들이다.

연말 정리를 하다 교무실 창 밖을 바라본다.
모과나무 숲 사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해사한 얼굴 위에 겨울 햇살이 매끄럽다.
김선생은 철쭉 한 그루를 화분에 옮겨 심고
가지마다 굵은 철사를 동여매어
꺾이지 않을만큼 이리 비틀고 저리 틀어
비는 시간마다 분재를 만든다.
모두들 모여 서서 잘되었다 잘되었다고 한다.
이 달이 가고 나면 또 한 해가 저문다.
모두들 잘되었다 잘되었다 할 것이다.
모과나무 사이에서 쏟아질 듯 웃던 아이들을
급하게 불러들이는 종소리가 울려 온다.

<김선생의 분재>

한창 전교조 문제가 일어날 때 그 명단에 이 시인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스타시인"이었으니 그의 이름이 도드라져보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고, 그래서 비난도 더 많이 받아야 했다.
그의 여리고 눈물나는 시편에 익숙했던 내게도 어쩌면 좀 낯설고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접시꽃 당신의 후반부가, 개인적인 슬픔에서 상처를 안은 세상으로 향하는 시선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위 인용시에도 그의 눈과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날마다 꺾이지 않을만큼만 비틀고 휘어서 그 모습이 보기 좋게 '잘되게"만드는 김선생의 분재.
행간에 할 말이 많으면서도, 억지로 눌러참으며, 분재를 하는 동료교사를 묵묵히 바라보는 이 교사의 눈은,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그리워한 바로 그 선생님의 눈빛을 가지고 있다.

어른들이 보기 좋게가 아니라, 받았던 모습 그대로 싱싱하고 건강하게 제 뜻을 올곧게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선생님..그는 직업인이 아니라 스승의 모습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가난한 환경에서 엇나가는 어린 제자를 보는 안타까움..사랑.. 이 땅의 역사의 의미를 묻는 제자에게 말을 얼버무리며 건너가야 하는 어른으로서의 자괴, 그 마음들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선생님의 모습이 여기 있다.

순하게 바라보는 어린 제자들의 눈빛을 두려워하며 기도하는 교사.
그 아이들의 눈빛을 지켜주기 위해 세상에 맞설 수 밖에 없는 고통.
교단을 떠나며 아이들을 두고 가는 미안함. 괴로움..그런 이야기들이 젊은 교사의 목소리로, 아이들의 밝고 높은 목소리로 번갈아 부채살처럼 접혀있다.

존경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스승을 가진 사람은 따뜻한 고향을 가진 사람처럼 두고두고 참 행복하다.
생각하면, 스승을 만나기도 어려운 세태가 되어버렸지만 스승이 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도 같다.
지금 내 조카들은, 중학교때 그 국어선생님의 따뜻한 목소리를, 저녁이 내리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그 선생님과 함께 책을 읽고 원고지를 만지던 시절을 눈물겹게 그리워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유별나게 독한 바람에 휘청였던 내 사춘기, 선생님과 책을 읽으며 보내던 그런 저녁이 있어서 견뎠는지도 모른다.

내 조카, 준규와 하늘이와 서쪽이가 꼭 이렇게 고민하고 아파하며 아이들을 생각하는 교사, 아니 선생님을 만나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시집을 덮고 잠깐 눈을 감는다..

우리 선생님...
대학에 입학하던 봄날, 세상을 멀리하지도, 자신을 잃을만큼 빠지지도 말고 혼자서라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마라고 술이 묻은 편지를 주시더니...
객지를 떠돌다 문득 선생님이 그리워 수소문했다가 접한 소식..
이미 선생님은 돌아가신 뒤였다. 마지막 편지를 주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고...

이다음에 꼭 선생님의 얼굴을 닮은 어른이 되겠다고 선생님께 다짐을 했는데... 그 선생님의 나이를 훌쩍 넘겨서도 이렇게 철없고 한심한 인물로 쓸쓸히 남았으니.

선생님..
그리워요..
선생님의 호처럼, 그 별나라에서도 작은 초당 한 채 지으시고 무슨 시를 쓰고 계신지요.
에~ 그 뭣이냐~
말끝마다 꼭꼭 붙던 후렴같은 그 말투도 다 기억하고 있는데...
가슴이 메입니다 선생님....




제목 :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지은이: 도종환
펴낸곳: 제 3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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