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 - 4. 청혼

사람마다 가슴에 강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그 물결이 흐르고 닿는 데를 스스로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몸의 주인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 의지로 다잡아지지 않는 정의 완강함이야 어쩌면 마음보다 더 먼저 주인일 듯 합니다.

아씨의 사랑은 언제나 시리고 쓸쓸했습니다.
밤을 새워 지었던 두루마기도 고운 명주수건도 나으리의 따뜻한 마음 한 조각 얻지 못해 더 춥고 외로운 기억들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어도, 일생 눈 밭에서 맨발로 서서 보는 쓸쓸함이라 할 지라도
이 사람 옆에서 그저 바라보고 기대고 싶었던 간절함.
가슴 가장 안 쪽의 그 자리에는 닿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우포청의 종사관과 토포군이 전멸을 하고, 궁궐의 어디까지 역모세력이 닿아있는지도 모르는 위기입니다.
산채로 잠입했던 다모가 잘못된 정보를 가져와서 충신인 훈련대장이 자진을 하고 이 죄를 물어 좌포장과 종사관은 투옥되었습니다.
처형을 당할 처지에서, 목숨을 건 채옥의 월궁고변으로 두 사람은 잠시 생명을 유예받은 상태였습니다.
이 지경에, 왕의 밀명을 저버리고 옥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군무를 이탈했던 종사관에게 좌포장은 대노했습니다.
사사로운 정보다는 사직을 생각하라는 호통, 흔들리는 종사관을 흐리는 옥이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그녀를 잊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아무리 목숨보다 아끼는 그녀라 한들, 적수를 찾지 못하는 비범한 검재와 의기의 다모라 한들, 한낱 관비에 불과한 그녀.
그녀의 목숨조차 그는 장담해줄 수가 없답니다.
아씨도 그분의 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정이 아무리 지극해도 인연이 아니라 믿는 것은,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그 사랑으로 더욱 더 멀어지고 닿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을 아는 때문입니다.
나으리의 이탈을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는 것도, 당신만이 그 분을 지켜줄 수 있다는 , 그 지킴이 사모를 이기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허나, 아무리 야무지고 단단한 아씨라 한들, 여인네입니다.
반가의 여식으로, 자신을 연모하지도 않고 오히려 멀리하는 이에게 먼저 청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돌하다 여기실 것이나...
시리고 아픈 마음을 아씨는 누릅니다.
소녀와 정혼을 해 주십시오.
무례하고 맹랑하다 여기실지 모르지만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으리 소녀와 정혼해 주십시오.


아가씨~!
어쩌면 짐작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아씨에게 어울리는 신분이 아니라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모른 척 했던 마음.
이렇게나 정면으로 말씀을 던져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나으리.
작정을 한 아씨보다 더 당황하십니다.

운명은 어쩌면 이렇게나 잔인할까요.
하필 이 모습을 목숨을 겨우 건지고 돌아온 옥이에게 보이고 말았습니다.
옥이를 마음에 담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말씀하시지요.
그렇다고 하여 소녀 또한 마음을 감추고 머뭇거리거면서
혼자 앓는 것이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에는 연연하지 마십시오.
하오나 신분을 떠나 소녀 또한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옥이의 모습을 본 나으리가 당황하시는 모습에도 아랑곳 없이, 당찬 아씨의 청혼은 이어집니다.
듣고 싶지 않는 나으리의 제지를, 아씨는 더는 견디지 못합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는 서출입니다.
제겐 사랑하는 정인이실 뿐입니다.

그 사람...
어의도 손을 놓은 것을, 자신의 목숨을 대신 빌어 살린 저 아이.

아씨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무작정 떼쓰는 아이처럼 짜증이 나고, 아씨의 말씀을 속절없이 듣고 만 옥이가 다칠 것이 더 두렵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나으리...
나으리가 계신 곳을 잠시 잊었습니다.
이 천한 것이, 목숨을 다해 나으리의 앞길을 지켜드리리라고, 차마 입 밖에 내놓지 못할 그 무서운 말은 이년의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그것만은 하늘도 허락해주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미련한 마음이었습니다.
나으리의 옆에서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들풀이라도, 먼 그림자로라도...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감히 그 옆자리는 꿈에도 바라지 않지만, 여기까지는 하눌님도 용서해주시리라 생각한 그것이 죄였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당돌한 아씨가 원망스럽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시지 않아도 저 아이에게는 더는 손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닫고 있는데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하신답니까.

나으리의 시선이 비껴가는 곳.
불현듯 아씨는 뒤를 돌아봅니다.


어쩌면 아씨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상황이 어쩔 수 없이 당신과 나으리를 묶게 되더라도, 그래도 그 분은 자신의 입으로는 옥이에게 차마 말씀을 못하실 것을 압니다.
차라리, 이렇게나 명확하게 선이 그어진 것을 체념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아씨는 받아들입니다.


죽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전의 제가 아니고, 이전의 나으리도 될 수 없는 것을 ...
차라리, 그냥 두시지 그러셨어요 나으리.
저를 살리지 마시고, 그냥 두셨더라면...
살과 뼈를 찢는 칼로도 아픈 줄 몰랐던 마음이, 지금 여기서 피를 흘립니다.

보지 마세요.
이 못난 것의 처지를 두고, 나으리 아파하지 마세요.
울지 않습니다.
울다니요.
천한 종년이 주인 나으리의 복된 일을 두고 어찌 망극한 짓을 꿈에라도 생각한답니까.
혼이 없는 빈 몸,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 년.
살아온 지난 길에 함께 해 주시고 그늘이 되어주신 것
생각만으로도 뼈에 새길 은공을, 더는 어찌 바라겠습니까.
하물며...
하물며, 자식을 갖지도 못한다는데요.
여인의 몸을 갖고 태어나, 은애하는 이의 핏줄을 이어주는 행복도 이년에겐 없다는데요.
언감생심 바라지는 못해도, 그래도 한가닥 못된 꿈으로 꾸었던 비밀한 마음.
이년을 아끼시는 그 마음에 행여나 품었던 여인으로서의 소망.
그러나...
아니라십니다.
죽음에서 깨어나자마자 들은 그 모진 말씀.
허락된 마음은 아니었지만 감추고 품었던 은애도 더는 아니라는데...
아파하지 마세요.
제 처지가 여기였음을 이제 압니다.
미련한 것의 삿된 꿈이 깨지는 것을 나으리.. 아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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