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민중에게 가장 지극한 사랑을 갖고 있었고 그만큼의 이력을 또 갖춘 이가 다산이라고.
남도를 도는 여정이라 마침 다산초당을 지나간다길래 들렀습니다.
<강진>을 생각하면 도요지보다 이 초당을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한번 꼭 들러보리라 생각했었는데 마침 참 좋았습니다.
그 대단한 집안이 신유박해와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나면서 다산은 강진에서 19년을 유배생활을 하면서 무려 5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깁니다.
훌륭한 철학자나 작가에게 유배는 가장 훌륭한 기회기도 하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갇혀있어서 다른 사회적 활동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태에서 유일한 정신의 탈출구가 결국은 후세의 보물로 남는다니, 생각하면 아이러니합니다.
방학이라 어린 손님들이 많이 왔네요.
지금은 숙제처럼 오는 길이라 해도 나중에 생각해보면 참 좋은 경험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아 참 저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랍니다.
까막눈인 이가 보아도 참 멋들어진 글씨입니다.
원래의 초당은 아니고 나중에 복원한 초당이라는데 위치한 곳만 보아도 조촐하고도 넉넉합니다.
이곳에 제자들과 함께 논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참...
다산의 영정.
얼마를 내면 여기에서 묵으면서 다산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한다고 합니다.
삐딱한 생각은 아니고...그냥 해보는 생각인데. 아무리 유배생활이라지만 대단한 양반들이었으니 이만한 생활이 가능했지 않을까요?
다산의 외가가 또 강진 해남일대의 최고명문인 해남윤씨 집안이랍니다.
윤선도와 공재윤두서를 낸 집안이지요. 다니다보면 맨 이 일대가 다 그 집안 그늘이었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대단합니다.
무식한 생각이겠지만 그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런 흔적 남기기를 좋아했을까요?
허명에 눈먼 소인배들도 아니고 이 대단한 양반도 벽에 글씨를 남기셨군요.
이름과 명분에 집착했던 그때의 풍토때문이었을까...
그 지루하고 감감한 유배생활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소비하고 싶어서였을까...
벽에 매달려 정으로 쪼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좀 웃깁니다. ^^;
이 천일각은 사실 다산유배 때는 없었던 것이라네요.
그런데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이 전경이 그야말로 기막힙니다.
다산초당에 가시는 분들은 초당보다 꼭 이곳을 들러보시기를 권합니다.
제가 이곳을 꼭 가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곳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좋아하는 정일근님의 시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를 바로 이곳에서 느껴보고 싶었지요.
아마도 정시인은 이곳에 와서 시를 잡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기가 우두봉일까요?
눈부시게 쨍한 한여름의 너른 강진벌판, 바라만 보아도 눈이 탁 트이는 이 청명함.
바다를 넘어오는 칼바람에 캄캄한 밤을 지새우며 유배된 지식인의 한과 두고온 가족에 대한 애끓은 사랑으로 지친 한 가장의 고통...
題 一信
아직은 未明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
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
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
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謫所의 밤
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
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逢頭亂髮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未明의 저 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을 밝혀
도 등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온 강진 벌판이 우
는 것 같구나.
題 二信
이 깊고 긴 겨울 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우를 심었
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
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우채를 썰면, 絶望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暴雪이 지는 밤이면 등잔
불을 어루어 詩經講義普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
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버릴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暴雪에 갖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四宣齊에 앉아 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
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는 한국신춘문예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로 뽑힙니다.
처음 이 시를 보았을때 얼음칼로 심장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겨울바람에 뒤척일 때마다 다시 일어나 들여다보는 시.
다시 보아도 눈물이 날만큼 명징하고 처연합니다.
그 슬픔이 무른 설움이 아니라 그야말로 힘줄 고운 한이 치솟는 둥둥 듬직한 소나무 같지 않습니까?
다산과 정시인의 웅혼한 힘이 마주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남았습니다.
그 경계가 어디쯤에서 갈라지는 지를 무지한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버릴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暴雪에 갖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四宣齊에 앉아 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
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아아...
길손을 말을 잃고 겨울바람이 바다를 건너오는 그 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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