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룹명/연인의 마을

동문회의 밤 -1

by 소금눈물 2011. 11. 10.






갑자기 음악이 꺼지고 조명이 눈을 부시게 켜졌을 때





웅성거리는 손님들보다 더 크게 나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나를 쏘아보고 있던 그 사람의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치근덕거리는 태윤선배에 대한 모멸감보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을 이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당혹감보다





나를 쏘아보며 비난하고 있는 듯한 그의 눈빛이 더 무서웠습니다.
당신이 뭔데 나를 비난하냐고 묻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런 눈길로 나를 보냐고,
당신이 나를 탓할 무슨 자격이 있냐고...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토록 죽도록 창피했던 이유,
이런 나를 보며 그가 화를 내고 있는 이유...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내 말문을 막았습니다.





당신 뭐야, 이거 지금 당신이 이랬어?
음악 끈 거 당신이 이런 거야?

태윤선배가 거세게 항의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네, 나는 대화할 때 시끄러운 거 싫어합니다.

선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가 내뱉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 사람의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알면서
나는 선배를 변호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선배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 앞에서 무섭게 화를 내고 있는 이 사람의 얼굴 밖에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이거 완전 또라이...
이봐 네가 여기 사장인가본데, 사장이면 손님한테 이래도 되?





선배의 욕설에 그의 눈빛이 비로소 선배를 향했습니다.

안되지요.
제대로 했으면 주먹부터 날리고 시작했어야죠.

멸시를 감추지 않으면서 그가 내뱉었습니다.





태윤선배의 얼굴이 구겨졌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존경받는 의사선생님으로 대접받았을 태윤선배.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겠지요.
더구나 여자 앞에서 이렇게 무시를 당했으니 저 자존심이 오죽 상처를 입었을까요.





춤 더 출 겁니까.

거품을 무는 선배를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가 던졌습니다.




아니요.





술 더 마실겁니까.





나는 그제서야 이 사람이 나를 구하기 위해 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런 데서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에게 난감한 꼴을 당하는 걸 그가 처음 본 것은 아니었겠지요.
그때마다 영업을 망치면서 이렇게 여자를 구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비로소 내가 지금 무슨 꼴인가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동문들이 모두 모여서 이 꼴을 보았으니 내일이면 온 동네방네 이상한 소문이 다 돌겠지요.
당장 취직은 고사하고 앞으로 서울에서 발붙일 수 있을까요.
이 동네가 얼마나 고압적이고 낡아빠진 연줄에 묶여 있는데 말이지요.

그런데도 당장 내일의 걱정보다 그가 나를 구하러 왔다는 안도감이 더 컸습니다.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굴었지만 내가 난감해지는 건 지나치지 못했군요.
해남도에서 그랬듯이요.





갑시다 그럼!

대답을 마치자마자 그는 번개처럼 내 팔목을 나꿔챘습니다.
소지품을 챙길 틈도 없이, 뒤에서 고함을 치는 태윤선배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나를 질질 끌고 나와버렸습니다.





무어라고 한참 소리를 치던 선배의 목소리도 금새 조용해졌습니다.
학교다닐 때부터 별로 소문이 좋지 못하던 사람이라 서먹해지는게 아쉬울 건 없지만
아마도... 당분간은 동문회에 나도 얼굴을 디밀지 못하겠지요.





근데요 태윤선배.
의사, 그거 대단한 거 아니예요.
우리끼리만 우리가 대단한 줄 알고 폼 잡고 그래요.
그냥 세상 하고 많은 밥벌이 중 하나예요.
이 직업 자체가 다른 직업 함부로 깔보고 내려다볼만큼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그리고요 선배.
선배가 생각하면 저 사람은, 견주기가 우스울 만큼 그렇게 무식하고 한심한 깡패일지도 모르는데요.
어떤 사람에겐...그 어떤 사람에겐요...

마음으로 떠올리는 것도 힘든... 남이 혹시 알아보고 뭐라 할까 겁이나서... 그렇게 서둘러 지워야 되는... 그렇게 어려운 사람이거든요.

누가 뭐래도... 어떤 사람에겐...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룹명 > 연인의 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도로 가는 배  (0) 2011.11.10
동문회  (0) 2011.11.10
미주의 얼굴 -6  (0) 2011.11.10
미주의 얼굴 -5  (0) 2011.11.10
미주의 얼굴 -4  (0) 201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