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내 자신에게 주었던 휴가,
양산 하나에 넘어가서 비행기타고 왔더니 참 파란만장하게도 보냈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가서 내 자리를 찾고 또 열심히 살아야지.
여기서 보낸 며칠은 내 인생에서 정말 별나게 보낸 경험이 될 거야.
다시는 겪지 않을 일들이겠지.
즐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 못 보고 가는 구나.
하기야 내가 꼭 보고 가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
사실은 다시 보지 않았으면 싶은 사람이지만.
차압권 사채업자... 조폭두목... 언제 어디서든 칼을 맞고 쫓기고 하는 사람...
잊어야지.
그런 사람인데...
인정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냉정할 줄 몰랐다.
서울에 돌아가는 대로 압류권부터 풀어달랬더니 채무자 좋으라고 덜렁 먼저 풀어주는 사채업자 없단다.
맞다. 내가 또 깜빡 잊었다.
이 남자, 사채업자다...
공항을 나오다가 그 사람을 기다리는 그녀를 보았다.
표정이 굳어버린다.
아니 이 여자는 우리가 밀월여행이라도 다녀온 줄 아나.
신경쓸 거 없다고 매몰차게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이... 그런데 어쩐지 서운해지려고 한다.
정말 웃기는 생각이지만...
혹시나 오해할까봐 다른 말을 못하게 막는 그를 보면서 내가 어쩐지 자꾸 초라해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를 불렀던 그 대따 돈 많고 멋진 애인은 알고보니 호텔방에 여자랑 같이 사는 남자였고 그 꼴을 이 사람은 다 보았던 거고 덩달아 나까지 그렇게 한심했던 거다.
바보같다... 한심하다...
이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는 내가 더 한심하다.
이 여자를 그 사람의 부하는 제수씨라고 부른다.
저 사람들은 공인된 커플이었구나...
집에 갈 거면 태워주든가. 앞집 사는데.
무심코 던지고 간 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졌다.
어쩐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것 같아 피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옆집 사는 걸 아냐고 기어이 묻는다.
속에다 담아둘 말을 절대 참지 못하는 타입인가보다.
뭐라고 해야했을까.
당신을 찾아왔던 어느날 베란다를 빌리려고 그냥 벨을 누른 옆집이 내 집이었다고, 그래서 알게 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그 사람을 우리집에 머무르게 하고 그의 상처를 치료하게 되었느냐고 물을까.
그 다음엔... 어떻게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비행기를 같이 탔냐고, 또 물을까.
할 말이 없는데... 변명이 싫었을 뿐인데.. 그런데 자꾸 비밀같아져서 구질구질해져.
무언가를 해명하고 미안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나쁜 사람인데. 그냥 사채업자 조폭일 뿐인데.
보기와는 다르게 빵도 직접 굽는 여자다.
그것도 썩 맛있게.
취미도 아니고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란다.
제 힘으로 정직하게 먹고 살려고 하는 이 여자는 그 사람과 그림이 잘 안 맞는다.
먹다가 걸릴 뻔 했다.
자기이름도 아냐고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이것저것을 알고 있냐고.
그사람과 무슨 말을 주고받는 사이냐고 묻고 싶었던 것일까.
이 여자는 내게 무엇을 궁금해하는 걸까. 말갛게 바라보면서 눈칼을 던져대는 여자.
백화점처럼 화려하고 차가워보이는 여자... 거침이 없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자꾸 내가 움츠려진다.
아빠가 당뇨이고 외할아버지가 알콜중독이면 아이에게 유전될 확률이 얼마냐 묻는다.
아빠가 당...설마. 그럼!!
눈도 깜박이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면서 여자는 똑똑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네 임신했어요..
이 얘길 왜 나한테 하는 거야? 지금?
그러니까, 그 사람 주변에서 괜히 얼쩡대지 말고 꺼져달란 말이지.
내가 뭐라고 이 여자 이렇게 함부로 구나? 누가 그래도 된다고 이 여자에게 말했어?
그런데..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축하한다고, 그냥 인사치레라도 해줘야 하는데...그게 옆집사는 사람들이 흔히 주고받는 인사일텐데...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나와버렸다.
먹은 빵이 목에서 차갑게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삼 개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동안에 돈을 구해야 한다.
주님은 감당해야할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고...
아빠 그러지 마.
글쎄 그 시련을 왜 내가 견뎌야 하는데.
왜 번번히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데.
왜 이상한 사람들한테서 말도 안되는 상처를 받으면서 내가 초라해져야 하는데!!
아빠는 훌륭한 목사님이라 피 한방울 안 섞인 아이들 키우느라 그렇다고 해.
그런데 왜 나에게 그 짐을 줘. 나 이제 착한 딸 노릇 지겨워.
하나님을 팔든 예수님을 팔든, 아빠가 해결해요.
좋은 음식 마음 놓고 먹어본 적 없고, 비싼 옷 한번 안 사고, 의사인 내 친구들이 다들 몇번씩 가보는 좋은데도 내 돈으로 못 다녀왔어.
일주일 꼬박 밤 늦게까지 죽어라 수술방에 서 있었어도 은행이자 갚기에도 먹차.
아빠. 나 정말 너무 힘들어요. 너무너무 힘들어.
아무 대책없이 좋은 사람이기밖에 못하는 아빠도 밉고,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내 앞날도 지겨워.
그런데... 지금까지도 내내 이랬는데... 왜 새삼 이게 이렇게 억울한지 모르겠어요.
왜 하필, 그지같은 사채업자 따위를 지우지 못하면서 엄하게 아빠에게 퍼붓고...
아빠 그런거 하루 이틀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이렇게 화가 나고 아픈지 모르겠어.
이 말은 차마 못했어요...아빠. 나 그 사람과 이제 얽히고 싶지 않아. 정말 그래.
그래서 이렇게 만든 아빠가 더 미워요...
그래도 살아야지.
당장 실업자가 되어버렸어.
집은 고사하고 당장 생활비도 급해.
기운내자 윤미주.
자아 이쁜 척~!!
가는데 마다 퇴짜를 당했다.
살갑게 굴던 그 선배들이 하나같이 만나주지도 않는다.
전 원장의 입김이 닿았다는 걸 눈치로 때려잡았다.
캄캄해진다...
재수없는 인간을 하필 이력서를 들고 다니다 마주칠 게 뭐야.
합법적인 사업을 하시겠다.
그래, 사채업해서 돈 많이 벌었나보다.
법은 뭐하고 있나몰라 도대체. 이런 인간들이 버젓하게 사업이라고 내놓고 하게.
의사가 이 시간에 돌아다녀도 되냐고?
누구땜에 이렇게 된 건지 아니?
나쁜 자식!!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병원에서 잘렸냰다.
그래, 이거 들고 취직하러 다닌다.
그러니까... 경매건...실수 없이 잘 처리해줘.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둘 다 제일 끔찍했어.
그러니까.. 다시 안 보고 제각기 살던 세상으로 살아가게 그렇게 해줘.
지칠대로 지쳐서 늘어져 차를 기다리는 나를 그가 잡았다.
그러더니 경매건을 풀어줄테니 세연씨를 불러내란다.
정말, 너 정말 최악인 인간이구나.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불쌍한 내 동생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뻔히 알면서 지금 그 말이 나오니?
어쩜 이렇게 끔찍하게 나쁜 인간일 수가 있니?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라 해도, 그래도 네 목숨을 살려준 은인인데 어쩜 이럴 수가 있니?
너 같은 쓰레기를 내가 왜 살렸을까.
혀를 깨물고 싶다, 이 나쁜 자식아.
두번 다시 이용당할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압류를 풀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그렇게 해봐 어디.
병원에서 잘렸다는 말을 듣고 세연씨 어머님이 불렀다.
여전히 시원시원한 분이다.
세연씨 말고 그냥 이분과 친구했으면 좋았겠다 싶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그것도 편치 않은 일이 되어버렸어.
사모님의 기사로 나타난 사람. 두목이었다.
나를 보고 얼굴이 굳는다.
악연은 참 질기기도 하다.
사모님은 그럼.. 정말 세연씨 말대로 세연씨 아버지가 거물조폭이었던 걸까?
왜 갑자기 내 사방에 조폭들이 둘러싸게 된 것일까.
나는 신호등도 꼭 파란불에만 건너는 아이로 살았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함부로 굴더니
이 사람 사모님앞에서는 정말 무참하게 무너졌다.
거침없이 똥개라 부른다 사모님은.
나이트 한 두어개 떠안고 나가떨어지란다.
입술을 깨물고 생각해보겠다는 이 사람의 말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앞에서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 그 사람도 참 어렵겠구나...
사모님의 숨겨진 다른 얼굴을 보았다.
그 화통하고 명랑한 얼굴 뒤에 이렇게 서슬푸른 냉정함을 숨기고 있었다니.
어깨가 떨려온다.
아는 척 안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내가 당신 생각해서 입 다문 줄 아니?
내가 조폭하고 아는 사이라고 말해서 좋을 게 뭐 있겠어.
그것도 시어머니가 될 지도 모르는 분한테.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타버렸다.
아 맞다, 그 사람의 애인이 이 오피스텔에 산다.
이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
내가 넘겨짚고 설쳤다. 그래, 설마 나 때문에 왔으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런데... 나도 참 한심했어..
시어머니 어쩌고 한건 명백하게 유치한 소리였다.
그게 이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이 사람이 상처받길 바랬던 건가?
설마...
창피하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한테 그딴 소리나 하고 자존심을 채우려 했다니...
갈 수록 형편없어져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