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반은 금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바타이유의 말이다.
금서는 읽히지 않는 책이 아니라 몰래 읽히는 책이라고도 했다.
금기를 깨거나 뛰어넘는 것은 모험이고 때로는 목숨까지 요구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넘어서고 완성하면서 또다른 세계를 여는 문이 되기도 한다.
금기는 막아서는데 역할이 있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창틀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
지오토가 그랬고, 모네가 그랬고, 세잔이 그랬고, 쿠르베가 그랬고 뒤샹이 그랬다.
평면적으로, 대상적인 아름다움과 응시의 소실점으로만 존재했던 자연은 인상파 화가들로 이르러 비로소 움직이는 사물들이 되고 깨어나고 움트고 흔들리는 생명체로 존재한다.
몇번이나 고쳐그린 생 빅투와르산.
지금의 우리에겐 아름다움과 감탄의 명작이지만, 세잔이 그릴 당시에는 눈이 흐린 노인네의 흔들리는 붓이 그린 말도 안되는 습작이었다.
몇그루 셀 수 있을 저 소나무 숲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짐작할수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흰 다리를 배경으로 앞쪽으로 펼쳐진 들판과 능선의 윤곽만으로 흐린 생 빅투와르산은 오히려 우리에게 생생한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연을 바라볼 때 바라보고자 하는 대상외에는, 그리고 가까운 거리의 사물 외에는 이처럼 뚜렷하지 않은 실체가 더 "자연"스러운 법이다.
깨는 것이 무거운가?
한번으로 그칠 파괴라면 그것은 일탈에 불과하다.
깨고 열어젖히고 문밖으로 나가 숨을 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열어젖힌 것이 창인가, 아니면 화려한 커튼 자락을 살짝 열어본 것에 지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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