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기 전에 다시 들르겠노라던 조검사를 만난 것은 그 뒤로 한참이 지나서였다.
가을 학회일로 갔던 때였다. 광주였던가. 아니 그 근처 어디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망연히, 아 그들이 이 어느 하늘 아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쓸쓸했던 것 밖에.
이틀 내리 이어지는 학회였다. 교수님들을 모시고 갔지만 그래도 밤에는 잠시 짬이 났다. 강선생이 잠깐 쉬자는 말에 호텔 바에 들렀다.
"넌 어떡할거냐?"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물었다. 과정을 다 마치고 난 후 진로를 말하는 소리였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병원에 남지도 못할 것이었고, 그렇다고 병원을 차려 나갈 것도 아니었고 백선배처럼 아프리카로 훌쩍 떠나버릴 주제도 아니었다.
"모르겠어. 월급쟁이로 좀 살아보는 게 제일 현실적이지 않냐? 요즘 내과 의사가 그리 맘대로 골라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선배, 잘 있대?"
"잘 있겠지. 그 형이야 뭐. 가끔 나는 그 형을 보면 참 헷갈려. 우리는 보통 순진하다고 하잖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차피 다들 한세상 그리 사는데 그런 사람들이 다 자기 앞의 이익을 몰라서 그러겠냐? 순진하게 사는 게 오히려 맘 편한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이름만 안걸어치면, 세상은 다 그런 사람들때문에 버텨나가는 거지. 이 엿같은 세상에서 뭔 이즘이니, 혁명이니 하는 소리 입에 달고 사는 이들, 다 제 추종자들 모아서 꼭대기 노릇하고 싶은 게지. 사회정의 제일 부르짖던 이들이 가장 확실하게 변절하는게 세상사 아니냐. 모르겠다. 나같은 놈이야 밥잘먹고 애새끼들 잘 커주고 마누라 낑낑대지만 않으면 다 눈감고 살겠다만 나같은 놈이야 어찌 백선배 같은 이들 짐작하겠니.
투사노릇하던 이들 얼굴 싹 바꾸고, 지금까지 자기 따라온 이들에게 돌아가라, 별거 아니었다..그런 소리 들을때마다 이렇게 내 배만 채우고 사는게 다행이다 싶어"
"다야 그러겠니."
"다야 그렇지 않겠지. 그런데 그 말잘하던 이들이 남기는게 지들이 한 족적을 무시하고 순진한 추종자들만 엿먹게 되니 그렇지.이름자 하나 세상에 남기는게 얼마나 무서운 지를 모르고"
"너 그런 생각까지 하는 줄 몰랐다"
"야 임마. 나도 젊다. 아무리 제 이기에만 빠진 의사 집단이라고 욕을 처먹어도 나도 굴러가는 대가리는 있다"
씁쓸하게 웃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희미한 불빛속에서 확연히 떠오르는 얼굴, 조형가검사였다.
그가 내미는 손에 얼떨결에 일어나서 악수를 했다.
"오랫만입니다. 처음에 아니신가 했는데 하시는 말씀 듣고..."
"아, 예....학회때문에 내려왔습니다"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강선생이 피곤하다고 물러갔다. 내일 준비할 자료도 챙겨야 할 것이었다.
다시 새로 술을 주문하고 도착할 동안 그도 나도 말이 끊어졌다.
흐린 불빛속에서 날카로운 콧날에 음영이 졌다.
"요즘....소식은 들으십니까?"
아 영이...창....
"
아닙니다. 제가 맡았던 분들도 아니고."
"그렇겠지요..."
나온 술을 따르고 담배를 주고받으면서 다시 말이 끊어졌다.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이발할 때를 지난 머리가 목덜미까지 흘렀다. 와이셔츠 깃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새 살이 내린 듯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당당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인상이 조금 부드럽게 다가왔다. 불빛 탓이었던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 탓이었던가.
"이선생님은....여자를 사랑해본 적 있으십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편견 탓이었을까. 근거없는 적개심으로 창의 가족들에게 향한 그의 칼날만 기억하던 때문이었을까.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나는 그런 것, 안 믿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기껏해야 삼개월을 가는 정신착란상태라고 하지 않던가요. 저는 지금까지 제가 꿈꾸어 온 길 밖에 아무 생각이 없던 놈이지요. 아무 죄가 없던 부모님이 세상을 그렇게 덧없이 떠나고, 어머님의 묫자리도 몰랐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도 남의 집에서 자라고. 내가 꿈을 이루어서 그 애를 찾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듣기론 누이께선, 그 댁에서 상당히 사랑을 받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자란 걸로 아는데요"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동정이지요. 그 아이의 처지를 동정한 거지요. 같은 밥을 먹이고 같은 옷을 입힌다고 그 애의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차라리 고아원에 맡겼다면 제가 이렇게 분노로 치를 떨진 않을 겝니다. 데려가서 그 아이를 제 식구로 만들어버렸어요. 하나뿐인 오빠도 그애는 믿지 않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던 그가, 저렇게 터무니없는 화를 가지고 창의 가족에게 화살을 돌리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빠라면 그렇게 길러주고 아껴준 이들에게 감사를 하고 절을 해야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사랑으로 길러서 누이가 자신을 외면하는게 분노의 이유라니.
"하지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지요. 따로 떨어져 살다보니 나는 그 애를 객관적인 한 대상으로 보게 되었고 다 자란 다음에 만났으니 그 애도 나를 오빠로 받아들일 시간이 없었을테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지구상의 어떤 나라에서도 다 이땅의 법과 제도가 관습이 된다고는 하지 못하겠지요?"
"그...그렇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이나 관습이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다르거나 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차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금과옥조로 믿고 있는 호주제도 사실은 일제시대에 정리한 일본의 법체계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나라에선 정작으로 사라진 것을요. 동성동본 금혼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조선 중엽이후로 유림의 힘이 커지고 임진왜란 이후로 흐트러진 사회를 주도하려는 그들의 통치수단이었다고도 하지요. 오히려 우리 역사에선 동성동본이 아니라 같은 직계나 근친간으로만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신분이나 위상이 높을수록 그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그랬지요"
"그거야 그렇지만....현실적으로 동성동본 불혼이나 호주제에 대한 논란은 충분히 나름대로 그 타당성이 있는 논란이지만 그렇다고 근친혼이나 인척혼은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제가 닫힌 사고를 가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이게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하는 말 아닐까요?"
그가 나를 돌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자조 같기도 하고 어림없다는 조소 같기도 했다.
"누가 정한 법인가요? 누가 제일 처음에 정한 법인가요? 그 법이 어디 하루 이틀에 정해졌답니까? 법이야 말로 그 사회구성원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가지는 관습적으로 받아들인 사고체계 아닙니까? 그러나 그게 절대 진리는 아니지요. 어디 처음부터 길이 있었답니까? 한 사람이 가고, 또 한 사람이 뒤를 따르고, 열 사람이 가고, 백 사람이 가고....그러다 길이 되고 그게 기준이 되는 것 아닌가요? 맨 처음에 가는 사람이 외롭다고 그게 꼭 돌을 맞아야 한답니까? 사회를 흐트러뜨릴 일도 아닌 일개 개인이 가지는 가치관의 차이를 누가 제단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야 말로 단죄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봅니다만..."
"잘못된 길이지요. 그 사회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기준은 절대 진리는 아니라 해도 나름대로 오랜 세월과 경험과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동의된 기준이지요. 사회적인 불만이나 봉기가 없는데 그 기준을 망가뜨리는 자는 보통 범법이고 범죄라고 이른다 들었습니다만"
"그럼, 그 합의된 강제권력이 한 사람의 인생과 꿈을 가로막고 있다면요? 저는 사회적인 보편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명 받은 사람이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 권력의 하늘도 벨 것입니다"
"상대방도 인정한 꿈입니까?"
그는 피식 웃었다.
"중요한 건 제 결단이지요. 상대는 제 진심을 모르니 거부하고 있지만 알면 그러겠습니까? 그 애는 지금 서백창 그놈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구요. 제가 그처럼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로 컸는데도 그게 자기를 보호하고 아껴준 거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갑자기 그때까지 마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조검사가 비어져 있던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 아가씬....그 분을 사랑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가짜예요. 함께 커 온 정리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라구요. 사랑? 흥 사랑도 믿지 않습니다. 잘해봤자 삼개월을 갈 정신착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누이를 가장 보호하고 누이께서 행복을 찾는 상대는 그분이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지만 그렇게 헌신적이고도 서로를 위해 아름답게 서 있는 커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함께 자란 정리라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지만 제겐 그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어찌 된 인연이 얽혀서 들여다볼 일이 많았지만 누이가 그분을 보는 눈이나, 그분이 누이를 대하는 건 단순히 오래 살아온 정리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영이에겐 내가 전부예요. 내가 보호자고, 내가 오빠고, 진정으로 그 애를 생각해줄 사람은 저 혼자라구요. 난 그애를 절대 놓지 않을 겁니다. 그애를 내게서 떼어내려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벨 것입니다"
턱이 떨리고 있었다. 그 차갑던 사람이 얼굴이 달아올라 잔을 쥔 손도 꽉 다물어져있었다. 이게 사랑인가, 아니면 집착인가 나는 두려워졌다.
"그놈이 어떤 놈인지를 이선생은 몰라요. 그놈이 가입한 서클도 알아보았었지요. 진달래라...진달래라... 천지를 물들이는 진달래....진달래가 어떤 꽃인줄 아십니까? 이 땅의 지천에 피는 꽃이라구요? 아니지요 제겐 먼저 이북의 국화로 기억됩니다. 그 놈은 그림을 그린답시고 시위현장에서 걸개나 만들던 놈이었어요. 그런 불온한 놈이 우리 영이를 다치게 할순 없어요."
아 이게 또 무슨 말인가.
때 늦은 이 색깔. 그러나 역시 언제라도 위협할 수 있는 그 불멸의 단죄.
그는 그리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연이어 들이키는 술을 막지도 못하고 나도 묵묵히 따라 마셨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 사람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 나는 두려워졌다.
내 사람은 아니겠으나, 내게로 올 몫은 아니겠으나 나는 영이가 다치는 게 정말 무서웠다. 그녀를 마음에서 놓은 것이 이럴 일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실내는 여전히 어두웠고, 나는 급속하게 계단을 뛰어오르는 취기때문에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