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배가 떠났다.
의국사람들과 마지막으로 가진 환송회에서 백선배는 여전히 씩씩했다.
왁자한 술자리에서도 백선배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우라질~ 이놈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장가도 잘 가고, 애새끼들도 퍽 퍽 잘 낳고, 대한민국 상류층이 되서 잘 살아봐라. 선생님 소리도 듣고, 나중엔 골프치면서 안돌아가는 세상 욕도 하고~!"
"거 참,혼자 독립군인척 좀 고만해. 형 그럴때마다 아주 죽이고 싶었어 그거 알어?
혁명을 목청으로 하냐? 밥그릇이 혁명이야. 지 밥그릇 뺏기고 그거 찾을 희망이 없을때 그때 터지는게 혁명이야. 혼자 우국지사인척 하면서 딴 사람들 물 먹이지 말라고. 나는 악착같이 내 몫 찾아가며 살거야. 나한텐 그게 혁명이야"
"이런 드런놈의 새끼, 너도 나한테 배운 놈들의 오만이라고 하고 싶은 거냐? 나도 드럽다. 나도 드러워. 가방 끈 긴게 뭔 자랑이냐? 배운 놈은 배운 값을 해야 죽어라 키워준 부모한테 얼굴이 스는 거지, 배운 값도 못하는 것들이 입만 살아서 소위 기층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착각하는 그런 놈들이 결국은 그런 민중을 이용해먹을 놈들이란 거 나도 잘 알아. 나도 그래 임마. 나도 그렇게 늙을 게 겁나서 이 망할놈의 대한민국 의사에서 도망가는 거라구!"
"형은 거기서 살아. 거기서 혁명도 하고, 배운 값도 하고,그러고 살아. 나는 이 썩어빠진 나라에서 뭔 희망을 찾겠다고 뒤지는지 몰라도, 그래도 여기서 등붙이고 살래. 내가 보기엔 형이 도망가는 거고, 형이 오만한 거야.조용히 가서 잘난척 말고 그냥 같이 퍼질러 살면서 그렇게 늙어, 우리 한없이 불쌍하게 여기면서. 난 잘난 척하는 것들 보기만 해도 열이 뻗는 인간이니까. 나 같은 놈들 욕하면서 그렇게 살아"
"그래 원준아. 이 새끼야. 너도 징글징글한 연애도 하고, 좋은 차 골라 타가면서, 그렇게 살아라. 이 망할 자식아"
백선배는 잔을 넘기다가 쿨적쿨적 울기 시작했다.
"주접을 다 갖춰가며 떨어라"
나도 울적해졌다.
백선배가 떠나면 가장 외로울 것은 나였다.
운동하던 선배들이, 폼 잡으면서 이름난 시민단체로 들어가고, 방송에 얼굴을 디밀고 그러는 것을 같이 우울해 가며 보던 선배였다.
방학때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봉사활동을 만들던 이들이, 이름난 집안과 혼인을 하고 전문의를 따기도 전에 병원 부지를 물색하는 걸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백주현, 잘난척 하지 말라고 해. 저만 공자냐? 혼자 고고한척 하면서 다른 사람들 눈 아래로 보는거 아주 드러워. 다 배불러야 인심도 생기는 거다. 내가 왜 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거냐? 이건 내가 노력해서 얻은 댓가지 왜 날 미리부터 잠재적인 범죄자 보듯 하는 거야?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내가 보기엔 대책없이 순진하거나 멍청하거나, 아니면 고도로 교활하거나, 그 셋중의 하나일 뿐야"
입원비가 없던 환자를 퇴원조치하던 일로 대판 싸운적이 있는 정형외과 강선배의 말이었다.
" 의사가 죄냐? 대한민국에서 왜 미리부터 욕먹고 들어가야 할 제일 만만한 집단이 의사가 되어버렸냐? 억울하면 따라오라고 해. 제 자식도 머리터지게 공부해서 들여밀라고 해. 공연히 주제도 아니면서 시기하지 말고."
나는 강선배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그리 살것이다.
돈이 되는 환자를 찾을 것이고, 조금의 이익이라도 남기기 위해 제약회사를 바꿔치울 것이고, 아마는 내 아들에게도 의대가라고 떠 밀 것이다.
현실적으론로는 강선배의 말대로 살 수 밖에 없을테고, 또 그걸 위해 지금까지 온 것이겠지만 나는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는 백선배를 축복할 수 밖에 없었다.
"형. 잘 다녀와. 까짓것~! 형이 없는 대한민국 내가 지키고 있을께"
"미친놈아 대한민국 말고 너나 지켜라. 너 102병동 그 여자한테 눈먼거 다 소문났어."
"......"
"여자? 별거 아니다. 불끄고 누우면 다 똑같아. 눈 멀때만 죽을 것 같지, 깨나봐라, 깨고 나면 그처럼 허망한 것이 없는게 여자다."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니긴 이 멍청한 자식아. 너 얼굴에 다 써있어. 네가 그 방 안 들락거린다고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만 통박굴리는거지, 더 왔다갔다 할 때마다 자갈굴러가는 소리나. 차라리 병훈이처럼 그냥 돌진해. 적어도 채이든지 갖든지 둘 중의 하나는 할거 아냐"
"형 술 취했어. 환자한테 눈 머는게 젤 재수없는 의사라며?"
"너 얼굴에 재수없는 놈이라고 써있어 이 새끼야. 너만 몰라, 너만 다 감추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멍하니 맞은 편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백열등 아래 뿌옇게 떠올랐다.
몰랐으면, 몰랐으면 가능했을까.
그녀를 모르고, 창을 몰랐다면, 그저 우연히 만난 환자와 의사로만 알았다면 나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갖은 핑계를 만들어 영의 방에 들락거리는 병훈을 보면서, 나는 묵묵하게 지켜만 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비겁한 놈이다. 나는 다가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이만큼서 멈추어 선 것이 다행이다. 다치지 않으니, 상처받지 않으니.
그녀는 내 맘을 모르니 거절할 일이 없을 것이었고, 나는 버림받지 않을 것이었다.
자꾸 술잔속에 그녀가 어른 거렸다. 웃으면서도 눈물이 겹쳐 보이는 그녀, 가슴에 엎드린 창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꾸만 떠올랐다.
"우라질. 이 미친놈이 왜 울고 지랄이야. 네가 가냐? 네가 가냐 이 새끼야? 너는 남아서 선생님 소리 들으며 잘 살놈이잖아, 이 미친놈이...나보다 지가 먼저 울어. 지가 먼저 울고 지랄이야....."
나는 그대로 백선배의 어깨를 잡고 엉엉 울어버렸다.
선배, 가지 마라고 하고 싶었다. 형이 없으면 내 걱정은 누가 하고, 대한민국 걱정은 누가 하냐고. 그리고 보이지도 못한 이 가슴은 또 누가 알아주냐고.
줄지어 올라오는 술병속에 그녀가 자꾸만 쓰러지고 있었다.
깨질듯한 두통 속에서 깬 것은 새벽이었다.
언제 잠들었던 걸까.
깨어보니 아파트였다.셔츠가 마구 구겨지고 신발이 아무렇게나 던져진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래도 이녀석들이 뻗어버린 나를 구겨놓고 달아난 모양이었다.
아..컨퍼런스 준비도 안했는데...
목이 탔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입는데 문득 바지 주머니에서 무엇가 비죽 내밀었다.
편지였다.
"미친놈아, 나 없으면 밥도 굶을 녀석이니 나 떠난 다음에 니 놈 욕할 것이 귓전에 쟁쟁해서 더러워서 던지고 간다. 나 대신 잘먹고 잘 살아라.그리고 그여자. 이쁘면 확 뺏어버려. 그냥 자버리면 어쩔거야?"
수표였다. 백만원 짜리였다. 백만원이면, 약을 얼마나 더 살텐데, 자잘한 거라면 의료기구도 성능 좋은 걸로 하나쯤 더 늘일 수 있을텐데...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졌다.
서둘러 출근하는데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창이었다.
"돌아오셨군요?"
"아...예...우리 영이 많이 챙겨주셨다구요.감사합니다"
여전히 맑고 하얀 얼굴이었다.
그의 웃음을 보자마자 백선배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많이 좋아지셨더군요. 저대로라면 곧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담당선생님 말씀으론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안병훈 이놈~!!
목례를 하고 돌아서다가 나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이런 말씀....여쭙기 뭐합니다만....조영씨가.....서백창씨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예?"
무슨 뜻인지를 몰라 의아하게 나를 보았다.
"아니요. 들은 말씀으론 남매도 아니고, 또 가족도 따로 계시고..."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묵묵히 서 있더니,
"그렇군요. 그 생각을 안해보았군요. 영이가 제게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나는 후회가 되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이었나. 그가 무슨 말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영이는...."
무슨 말을 할 듯 나를 바라보던 그가 그냥 빙긋 웃고 말았다.
"생각해보지요. 오늘의 숙제군요. 영이가 누군지, 제가 누군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니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압니다. 이선생님 말씀.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드릴 말씀도 또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만, 너무나 잘 알지만, 그걸 안다는 것과 확인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창이 영에게 십자가이고 빛이라 했던가. 기쁨이고 슬픔이라 했던가.
나는 돌아서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아침이었다. 기운을 내야지. 기운을 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