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을 마음에 두었던가...잊었던가...
시작이 무엇이었고 접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처음 그들을 만나던 날의 그 아침 산사, 부시어 떨리던 창의 미소.
그리고 비누방울처럼 날리던 영의 웃음소리...
매화꽃이 날리던 그 밤, 물결소리에 따라 흐르던 창의 낮은 목소리.
태풍이 휩쓸어간 그 지리산의 산동네, 속살이 다 드러난 산길에서 내게 다짜고짜 겨누던 창의 눈길. 창의 등에 얼굴을 묻고 관목 숲속을 사라지던 영이.
때로 내게 기쁨이었던가, 때로 내게 설렘이고 또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이었던가...그들...
비오던 여름날, 서점에서 만났던 그 모습. 검은 풀오버 위로 한줄기 카라처럼 솟은 영의 흰 목, 따로 있어도 한 몸인 양 움직이던 두 사람. 부드럽게 흐르던 그 찻집의 무반주 첼로.....
그리고 상상할 수 없던 창과 영의 지난 발길, 짧은 생애를 짐작할 수 없던 그 신산한 나날.....
창이 없었으면 내가 영을 마음에 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찌했든 나와 늘 한발 물러 서 있는 사람이고, 거울 속의 환영처럼 내게 얼굴은 보여주되 손길은 닿지 못할 사람이었다.
병훈에겐 그녀는 실체였겠지만, 내게는 환영이었고, 강선생에겐 환자였겠지만, 내겐....내겐.....
내가 아픈 환자였다.
어디에고 이 상처를 보이고 하소연 할 수 없는.....
창...역시 그랬다.
나는 그로 인해 영이에게서 한발 물러 설수 밖에 없었다.
그들 사이의 그 끈끈한 정은, 사랑이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움직이고 하나로 묶이는 그 무엇이었다. 그 수려한 젊은이가, 화필에 자신의 꿈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담았을 그 젊은이가 그 사랑 하나로 세상을 버리고 다만 그녀에게로 돌아선 그 사랑, 가늠할 수 없는 그 번뇌와 아픔에 나는 물러섰다.
한번도 큰소리로 책하지 않았지만 늘 지켜보며 산이 되어주었을 그 속 깊은 아버지, 업동이 계집애를 배 아파 낳은 어떤 자식보다 아끼며 안아준 따뜻한 어머니, 그 가정이 깨어졌다. 영이의 오빠로 인해.
당연히 가질 분노조차 그는 영이로 인해 견딘다.
그가 칼을 쥐면 영이가 가장 고통스러워 할 것을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내가, 나같은 사람이 어찌 그 둘 사이에 끼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세상에 그들 같은 사람이 존재하노라고 그 목소리를 전할 인물로 내가 선택된 것이겠지.
그런데도 나는 아팠다. 내 몫이 되어 주지 못할 그 사랑에 나는 다쳤다.
향기없는 마른 꽃 같은 이전의 그 실연보다도....한번도 손을 내밀지 못한 이 마음에 나는....더 마음이 저렸다.
학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그들을 잊기로 했다.
내가 들었으면 이미 창과 영도 잘 아는 일일 것이다. 아마 그들에겐 어떤 칼날보다 더 깊이 다친 상처였을 것이다.
아프니...나도 아프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다..
너로 인해 살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응급실의 그 새벽, 습한 대기를 흐르던 창의 낮은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들의 그 아픔과, 존재 이유에 나는...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이다.
나는 모르는 것이다.
학회에서 돌아와서 나는 그 붉은 노트를 캐비닛 안쪽에 깊이 넣어두었다.
아픈 아랑, 내가 기억하마. 너와 너의 도미를 내가 기억하마. 그리고....축복해주마...잊어라, 아픈 일은 모두 잊어라. 그가 네 곁에 있으니 그의 사람으로 그냥 그대로 머물러라. 다시는 아무에게도 흔들리지 말고, 누구의 눈길도 끌지 않는 색깔없는 꽃으로 남아서.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생과 사를 넘는 경계가 날마다였고, 나는 애써 환자들의 비명과 소생의 기쁨 속에서 스스로를 묻으려고 애썼다. 오프날에도 밖에 나가지 않고 처박혀서 책을 뒤적였고, 날마다 병훈과 아웅다웅 하면서 병원에서만 맴돌았다. 안그래도 성질 더럽다는 악명에 칼날이라는 별명만 더 얻었다. 건드리면 베인다는 소리였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서 .....그들을 잊고자 했다.
그해 겨울, 나는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창과 영의 안부편지였다.
ㅁ자 한쪽이 부드럽게 일그러지는 영의 편지는 짧았다.
"선생님, 지리산의 겨울은 늘 빨리 다가옵니다.
아침마다 닿는 계곡의 물소리가 늘 한발 먼저 서늘하게 다가오지요.
평안하시지요. 저희들도 다 잘 있습니다. 아침마다 운동도 부지런히 하고 몸도 많이 나아졌어요. 새봄에 대전 갈일이 있으면 꼭 한 번 들러서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선생님, 기쁜 소식은 없으신가요? 좋은 분이 있으시면 눈이 많이 내리기 전 꼭 한번 다녀가세요. 제가 좋은 차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행간에 담겼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숨소리를 나는 부질없이 찾다가 내려놓았다. 그러지 말자, 원준아....그러지 말자.....나는 숨을 몰아쉬다가...맥없이 편지를 접었다.
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좋구나..그들은.
그렇게 다정하게 마주 보고 선 나무 같은 그들은...참으로 아름답구나. 눈이 내리면 세상의 신산한 바람으로부터 잊혀져서 다정히 그들의 젖은 어깨를 마주대고 서로만 바라보겠구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그 적막한 숲에서 서로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그 숨결만으로 그들은 행복하겠구나.
나는 영이의 편지를 곱게 다시 접어 넣고 창의 것을 집었다.
그림을 하던 사람답게 단정하고 아름다운 글씨체였다. 그림을 그리듯 부드럽게 흘려쓴 서체에 사람의 모습까지 얹혀졌다.
변해가는 지리산의 풍경들, 아침마다 마주하는 영이의 얼굴들, 그들의 자잘하고 따뜻한 일상을 읽어내려가다 내 눈이 커졌다.
- 영이의 숨소리가 많이 거칠어졌습니다. 기온이 너무 내려가면 산공기가 좋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서울 본가로 돌아 가야 하나 고민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는.....지금과는 달라져야겠지요. 아니 달라져야 한다고 먼저 생각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과 어찌 달라져야 한다는 것인지.
저 아이의 웃음을 보면서, 아픈 모습을 보면서 오빠도 아니고, 지금까지 자라온 가족으로서도 아닌, 그저 한 사내로 저 아이를 보고, 심중에 담아온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영이는 제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를 굳이 오빠로 두려고만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를 보는 영이의 부드러운 떨림과 손길을 제가 어찌 짐작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보이지 않아도 드러나는 그 속내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제 자신을 속이는 것이겠지요. 저를 오라비로 보아야 한다는 그 심중을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 아픔을 제가 어찌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서로가 굳이 꺼내지 못하는 이 마음이 너무나 답답하고 제 마음을 속이는 그 아이의 말이 아픕니다.
잘못 만난 사람들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아이를 주신 하늘에 감사합니다. 이 연을 허락해주신 이께 감읍합니다.
하지만 혼자서 깊어가는 저 아이의 울음을 어찌 해야 할지....
제가 세상에서 가진 것은 오직 저 아이 하나 뿐입니다.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으나....세상에서 가진 꿈은 제겐 저 아이 뿐입니다.
저 아이로 인해 살았습니다. 저 아이가 세상을 잊게 했습니다.
우리가 갖는 이 꿈이 정말 어려운 것일까요?
스스로만 속이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사내로 그 아이를 품고, 남은 날을 같이 걸어가고 싶은 이 마음이 그 아이를 왜 두렵게 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그 아이의 무엇을 다치게 하는 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그 사람이.....일전에 다녀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