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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41.

by 소금눈물 2011. 11. 10.

01/01/2004 06:35 pm공개조회수 0 2



"그애는 이미... 내 사람이오..."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불쑥 던졌다.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럼, 그 일기속의 자학의 의미는!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해도 영이는 누이지 않은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어떤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는 없겠지요"

나는 애써 목청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대꾸를 했다.
그는 지그시 웃으며 들고 있던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술이 출렁거렸다.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처럼 이리 저리 잔을 흔들며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있던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다 큰 성인이 다른 이성에게 하는 말이오. 이게 무슨 소린줄을 모르진 않겠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밤 저는 조검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겁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굳어졌다.

그는 다시 피식 웃었다.

"내가 그랬잖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지구상의 어떤 곳에선 제 형제나 인척하고만 부부가 되는 종족이 어디든지 있다고. 그들을 다 우리의 잣대로만 재시겠소? 그들을 다 우리의 잣대로 단죄하겠소? 누가 주었어? 그 권리? 나라고 고민이 없었겠소? 내게도 단 한 번의 사랑이었다는 말이오. 나는 내 꿈 밖에, 내 온전한 가족을 찾고 이루고 싶은 것 밖에 관심이 없던 놈이오. 그런데 내가 영이말고 누구에게서 가족을 만들겠소? 내게도 그 뿐이야. 함부로 단죄하지 말아요 의사선생. 레비 스트로스가 쓴 슬픈 열대를 보면, 우리의 상식으론 얼마든지 경악하고 돌을 던질 원주민의 풍습이나 법이 질펀하게 나오지. 하지만 좀 더 발전한 세계든, 좀 더 미개한 세계든 말야, 하늘 아래 존재하는 각각의 존엄은 누구에게나 인정받아야 해. 갖고 있는 주거양식이나 먹을거리의 형태로서가 아니고 그 뇌와 가슴에 담긴 물질의 가치로 말이지"

"그 가치를 구태여 지구상의 오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검사님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 땅의 생활 법규나 풍습에선 찾기 어려웠던가요?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대로 나름대로의 존엄으로 인정받아야지 어떤 한사람의 일방적인 애정이나 가치관으로원하지 않게도 상대방이 고통을 겪는다면요?"

"영이는 이미 나를 사랑해. 오빠가 아니라 한 남자로! 내가 미친 놈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내가 그애를 좋아한다고 해도 강간이라도 했겠소? 합의된 결과야. 우리는 이미 서로의 선택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있다고"

"그러면 그 분께서 지금 계시는 곳이 왜 조검사님의 옆이 아니고 서백창씨의 옆일까요? 그리고 그들이 지금 그토록이나 행복해보이는데요?"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으로 괴로운 표정이 나타났다.

"보시오. 나는 이미 그 애를 크게 다치게 할 뻔 했소. 댓가로 그 놈의 아비를 거두게 하긴 했지만 나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 현실적으로 나는 이 동네의 조직폭력배와 대치중인 검사야. 그리고 그 앤 지금 몸이 안 좋아요. 내가 지금은 그애를 옆에 둘 수 없으니 잠시 돌려보낸 거요. 그애의 몸이 편한 곳에. 하지만 기억해 둬야 해요. 그애는 궁극적으로 내게 올 것이고, 그렇게 될 거야. 누구도 그애가 내게 오는 것을 막는다면...."

"그런다면요"

"두고 볼 수는 없겠지"

짧고도 단호한 말이었다.
그리고 뜸을 들였다가 다시 뱉었다.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말이야. 서백창, 그 놈이든, 아니면 영이라도 말이야....."

목구멍이 타는듯이 따가워졌다.
취기겠지. 잘못 들은 것이겠지.
벚꽃이 날리던 나무 아래, 그 밤. 물소리 부드럽게 흐르던 그 밤....꿈결에 본 듯 아련하고, 지금 보는 듯 선연한 그 모습. 흐르던 달빛 아래 마주 앉아서 그들의 어깨위로 날아내리던 벚꽃잎들, 그 사이를 천천히 불어가던 밤바람.

병실에 누워 있던 영이. 밤새 간호하다 영이의 가슴에 얼굴을 댄 채 눈물 짓던 창, 홀연히 깨어나 그 얼굴을 어루만지던 영...

그런 것이었던가.
그들이 세상에 보이던 완강한 거부감과 알 수없이 절박해보이던 사랑과 미소는 이런 것이었던가...그것이었나.
그 불안과 슬픔이 내가 끼어들지 못했던 그들의 그 벽 너머의 진실이었던가.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아낀다던 오키프 화집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그 철저한 여성성의 주장, 온통 한 권이 전부 여성 성기를 확대해 놓은 듯한 꽃으로 범벅이 된 그 화집에 담긴 옥이의 상처와 슬픔. 자신이 여성이어서 당하는 그 고통, 그 분노. 화집의 뒤쪽에 자리잡은 멕시코 황소의 그 하얗게 삭은 두개골에서 나는 조검사의 그림자를 보았다. 사내들이 가진 그 저주받을 야성과 허망함을, 그녀가 그토록이나 두려워하고 혐오한 그 진실을.

그녀가 아랑이 되었구나.
아랑이 되고 말았구나.
찢기고 상처받은 그 아름다운 꽃과, 그 아픈 꽃을 지키고 선 그 사내의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났다.
이런 것이었구나, 그들의 사랑은.
난데없이 등장한 내게 다짜고짜 몽둥이를 들이대던 창의 방어는...이런 것이었구나.....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겠지. 창이 그토록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던 그 현장으로, 동료들이 모두 떠난 그 뒤에도 그는 돌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상처받은 영이 옆에 있는데, 그의 꿈과 희망을 펼치기엔 그는 영이를 너무 사랑하고, 사랑해서 그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정이 가까와질 무렵 자리를 일어섰다.
차마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들었다.
내겐 다시 예전의 그들이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아름답던 어린 처녀의 얼굴과, 그 맑고 기품있던 청년의 모습은 , 날카로운 상처와 고통 속에 서 있는 슬프고 아픈 그들의 그림자와 겹쳐 보일 것이다.

비틀 거리는 내 눈 앞으로 자꾸만 나무들이 쓰러졌고, 계단들이 무너져 내렸고..... 나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고통스런 밤이었다. 나는 이 밤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영이 당한 상처가 있는 밤이었고, 창의 분노가 잠긴 밤이었다.

다시 오지 말거라, 인연이여.
다시는 내게 그 아픈 얼굴을 보이지 말거라.
나는 너희들의 아픈 얼굴을 알지 못한다.
너희들이 보여준 그 몸짓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한 뿌리로 자란 나무들처럼
지상에 발을 묻고, 하늘에 두 손을 뻗어 움직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너희들의 목숨을 다 하여라.
절대로 움직이지 말아라. 바람에 흔들리지도 말아라.
너희는 한 몸의 나무, 한 가지의 사람들. 모진 바람에 한 잎도 내어주지 말고, 한 송이도 허투루 흘리지 말고.
너희 둘이만 가거라. 돌아보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내게 다시는 얼굴을 보이지 말아라.
차마 아픈 사람들아....


나는 그대로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어둔 내 배개 밑으로 한없이 슬픈 얼굴을 한 여인이 울면서 걸어갔다. 그 뒤를 상처 입은 무사가 아픈 다리를 끌면서 그녀를 오래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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