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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15.

by 소금눈물 2011. 11. 10.

12/23/2003 03:20 pm공개조회수 0 2


"이 선생님이시지요?"

"예"

"기억하시려나...지리산.....저 서백창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시골에 묻힌 사람 답지 않게 손가락이 희고 가즈런했다.

"그런데 어떻게 대전에를....."

"영이가, 이 근처 병원에를 올 일이 있어서요"

"병원에를 요?"

어처구니 없게 나는 순간 부인과를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내 눈길이 먼저 영의 몸을 살폈다. 창의 뒷전에서 조용히 미소를 짓던 영이 눈이 닿자 얼굴이 붉어지면서 작게 고개를 숙였다.

"책을 보러 나오셨나 보군요?"

다른 사내의 눈길이 찰나라도 영에게 닿는 것을 못 견디는 듯이 내 눈길을 빠르게 자르며 창이 말했다.

"네."
"저흰 화집을 좀 고르던 참입니다."
"그림을...그리시는가 보군요."

내 말엔 대답을 하지 않고 창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번 부드럽게 볼이 패었다.

"서점 이층에 향이 좋은 차를 내는 찻집이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우리 셋은 찻집으로 올라갔다.
낡은 목조계단이 발이 얹힐 때마다 깊게 울렸다.
문을 열자 매달아 놓은 풍경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비가 와서일까. 한낮인데도 찻집은 두꺼운 커튼을 드리워놓은 듯 불빛이 어두웠다.낮은 물소리처럼 부드럽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흘렀다.

구석쪽을 골라 영이 창가로 앉고 창이 옆에 앉고 나는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차는....지리산에서 나는 것이 정말 좋은데요.제주도에도 큰 기업이 대량으로 재배하는 큰 차밭이 있지만, 깊은 맛은 덜한 것 같습니다.중국에서 처음 들여올 때 먼저 자리잡은 곳도 지리산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여름에 받은 종이가방이 생각났다.

바쁜 수련의 생활에 그런 차를 우려먹을 짬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따금 마른 찻잎을 꺼내 코에 대어보곤 했다. 쌉쌀하고 깊은 숲 속의 냄새가 배인 찻잎은 물에 우리기도 전에 내 마음부터 녹색으로 물들이곤 했다. 영이.....나는 그 초록물이 내 가슴을 서서히 물들일동안....나도 모르게 아프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저 단순한 감사의 인사로 건넨 그 마른 찻잎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고, 또 쓸쓸하게 하는지 모를 것이었다.

주인이 지인으로부터 직접 받는다는 차가 나왔다.
한 모금 마시고, 따라나온 강정을 영이 베어무는 걸 창이 바라보았다. 영이 무슨 작은 손짓을 하던 창의 눈길이 곧바로 따라왔고, 창이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영은 반사적으로 창의 몸짓을 따라갔다. 둘은 한 몸의 사람처럼 같이 움직이고 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까...병원이라고 하셨는데.....어디 편찮으신데라도....."

"아, 크게 아픈 건 아니구요. 매달 영이가 약을 타가는데 검사를 할 때가 되어서.그런데 생각보다 늦어져서 오늘은 여기에 기어이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듯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맺는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부인과는 아니구나. 왜 내가 작게 안도했을까.

"어디 병원에 계신다구요?"
"아...요 근첩니다. 대학병원이지요."
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으로 바람이 지나가는지, 창쪽으로 난 나뭇가지가 휘청 흔들렸다. 커다란 손바닥 모양을 한 포플러 잎이 몇 장 보도로 떨어졌다.

"거긴....그 뒤엔 별 피해는 없지요?"

"아, 예.... 큰 비가 몇 번 오고 복구공사가 좀 늦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대충은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 마을도 얼추 다시 자리를 잡구요. 젊은이들이 없어서 어르신들이 고생을 좀 했지요"

그렇겠구나. 오랜 비에 까맣게 이끼가 오르던 마을 담장이 떠올랐다. 축사 지붕으로 피던 흰 버섯들도.

그리고 말은 끊어졌다.
바삭바삭 강정을 먹는 영의 소리만 어색한 침묵을 깨고 있었고, 이따금 영을 돌아보며 창이 미소를 짓고, 창밖을 내다보던 영이 쉼표처럼 창을 돌아보며 웃고....그리고 내내 실내는 고요했다. 휴일 오후인데도 비가 내려서인지 찻집은 한산했다.


이윽고 우리는 일어섰다.
다시 악수를 주고 받으며, 창이 들고 있던 가방을 비로소 보았다. 붓 몇 자루와 둘둘 말린 종이 뭉치였다.

문을 밀고 나서자, 복병처럼 후두둑 비가 몰아쳤다. 나는 먼저 내려섰다.

어쩐지 면도칼이 예리하게 가슴 언저리를 훑고 지나는 것만 같았다.

우연처럼 나는 자꾸만 저들을 보게 되는구나.
다시 보고 싶지 않고, 그러나
또 꼭 다시 보고만 싶은 이 마음은 무어란 말인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종이 한장의 틈도 없이 부드럽고 단단한 미소로 얽힌 저들 틈에 누가 들어설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나는 어쩐지,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빗줄기는 곧장 폭우로 변했다. 가을이 벌써 한뼘이나 깊었는데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옷이 젖는지 가슴이 젖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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