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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13.

by 소금눈물 2011. 11. 10.

12/23/2003 03:06 pm공개조회수 0 1



그리고...다시 지루한 일상이 이어졌다.

몇 개의 태풍이 다시 지나갔고, 수재의연금 모금이 시작되었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날마다 빠지지 않고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렸다.

로비를 지나가다, 문득 티비를 보면 흙탕물이 바다를 이루는 들판이 날마다 이어졌고 뭉개진 산비탈에서 울고있는 노인들이 보였다.

나는 가끔씩.....지리산을 생각했다.태풍이, 다시 그 마을을 지나갔을까. 그 냇가에 달그림자를 깊게 내리던 매화나무들은 무사할까. 다들...무사할까...

아니었다.

내가 잊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다. 물안개가 오르던 산길, 이맛전에 살짝 걸려있던 비에 젖은 머리칼 몇 올, 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을 때 깊게 내려앉던 영의 검은 눈썹. 살짝 미소를 지을 때마다 볼우물이 깊게 패이던 창의 모습.

그러면서 늘 따라 올라오는 건, 멀찌감치서 그들을 보기만 했던, 아니 늘 보고만 있던 내 모습이었다.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할.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잠시 그들 곁을 스쳐 지나온 것이었다.

장마처럼 지리한 나날이었다.

우리과 교수 한명이 미국으로 갔고, 동기 중 누구는 이름난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해서 전문의 자격을 따기도 전에 오픈을 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모이면 다들 이런저런 말들을 했지만, 결국은 그럴 주제가 못된 한탄이 끝이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많이 따르던 일반외과의 백선배는 아프리카로 떠날 모양이었다. 제약회사와 손이 닿는대로 약을 구해두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같은 놈이 딱인데 말야. 원준아. 그런 오지에선 어설픈 인도주의로 나섰다가는 지레 시달려 죽기 십상이다. 사는게 소박하면 사람도 그럴 것 같지? 천만에야. 의식이 족해야 예가 나온다는 건 아프리카 밀림에서도 똑같을 거다. 먹고 살아 내는게 문제지. 너같이 독한 놈이 가야하는데.어때? 너도 어차피 여기서 누가 잡아매는 것도 아니고....같이 갈래?"

나는 말없이 빙긋 웃어주었다.

시위가 있을 때마다 수업도 뒷전으로 밀고 부지런히 끼던 선배였다. 전대협 진군식이라고 결강을 하던 날, 교수는 이번 시험을 못 치면 바로 유급이라고 했다. 기본적인 의술도 갖추지 못한 의사가 어찌 사회에 나가 환자들을, 세상을, 다룰 수 있냐고 했다.

"선생님, 저는 세상을 '다루'는 의사는 되지 않으렵니다"

교수는 얼굴이 벌개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선배가 이 병원을 떠나면 나는 좀 쓸쓸할 것이었다. 다들 꼴통이라고 백선배를 비웃었지만, 나는 그가 갖고 있는 대책없는 순진함이 좋았다.

선배가 떠나면, 나는 밤 늦게 찾아와서 고래고래 울며 술을 마실 사람이 없을 터였고, 시험 족보를 몰래 챙겨주며 식권을 건네줄 사람도 없을 터였다.

"너 임마.너 혼자 그렇게 주먹쥐고 살지 마라. 원한 품은 것처럼 살지 마란 말이야 임마. 부모 없는 게 너 뿐이냐? 세상이 니 부모를 잡아갔냐? 하늘이 내고 거두는 이치를 어쩌란 말이냐? 독하게 살지 마라 이 새끼야. 세상에 한을 품으면 그 한이 너를 먼저 잡아먹는다"

예과 때였던가. 학교를 그만두고 죽겠다고 난리치던 때였던가. 어설픈 짝사랑의 상대로부터 , 부모없는 자식이라고 딱지를 맞았을때 내 자췻방에 찾아와 주먹을 날리며 하던 말이었다.

선배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여기까지도 오지 못했겠지.
지나고 보니 그 사랑은 참말로 별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라고 위로받고 싶었던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게 무심해졌다. 그녀는 지방에 준종합병원을 가진 내 후배와 사귀었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치면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모란꽃처럼 곱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물들인 색종이로 만든 것처럼 푸석푸석하고 향기없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다행이었다. 나를 잘 지나쳐갔다. 나 역시 그녀를 비껴간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나는 가진 게 많지 않았고, 그 적은 것조차 언젠가는 기꺼이 내 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뺏기기 전에 갖지 말것, 도망치는 일이 있기 전에 마음을 주지 말 것....나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그래야 안전하지.그래야 다치지 않지......

환자들은 쉴새없이 병원을 들락거렸고, 이따금 복도에선 자식을 잃은 부모가 가슴을 찢어가며 우는 비명이 들렸고, 그런 날 오후에는 또 아기를 안고 나서는 행복한 젊은 부부들의 미소도 햇살처럼 흘렀다.

세상은 어차피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 이 세상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또 이 세상에서 천천히 걸어나가는 사람도 날마다 이어졌다. 나는 무심히 그런 발길을 고개를 갸우뚱 숙이며 바라보았다. 살아가는 일은 지루한 여름 장마와도 닮아 있었다.

그들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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