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참 잘 어울립니다....그런데 저 젊은 사람들이 어찌 암자에서 숨어삽니까"
"숨어산다....그 말이 맞겠구려.....나 같은 사람이 어찌 저이들의 속내를 알겠소만, 창이가 들어와 산 게...한 삼년 되나....한동안 읍내 경찰서 형사들도 들락거리고 하더니...남모르는 일이 있겠지.....계집 아이나 사내 애나 쉽게 세상으로 나갈 사람들 같지가 않소."
이장이 꽁초가 된 담배를 마당으로 던졌다. 담배 어둠속으로 짧게 꼬리를 끌며 떨어졌다.
"일찍 주무시오..애쓰셨소. 이런 산골이야 천둥 난리가 쳐도 누가 들여다 보길 하나...나라에 별 보탬도 안될 사람들이니 이리 살다 가겠지...."
씁쓸하게 중얼거리고는 이장도 어둠 속으로 내려셨다.
술판은 노래판으로 넘어가있었다.
누군가 남행열차를 부르고, 남행열차는 다시 종점을 넘어가 천둥산 박달재까지 닿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숙소로 돌아왔다.
산골의 밤은 우물 속처럼 캄캄하고 깊었다.
별도 없는 밤, 나는 익숙하지 않은 밤길을 헤메다가 당산나무 가지에 호되게 이마를 찧었다. 별이 갈 길을 인도해 주던 시대는 행복했다...문득 그런 경구가 떠올랐다. 내게 별 빛이 있었던가. 나를 이끌어주던 그런 별이 있었던가.
아직 처서가 지나지 않았으니 여름이 다 접어진 것도 아니건만, 줄창 내리던 비때문인지, 산중이어선지 날은 으슬으슬 추웠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걸었다.
왜 그랬을까. 갑자기 왜 쓸쓸해졌을까.
실로폰처럼 맑게 웃던 여자의 웃음소리, 다친 여자때문에 사색이 되었던 그 남자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웃음 속으로....나도 들어가고 싶었던 것일까.....나도 그 사람의 웃음의 이유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미친놈...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일이야 있겠나....
다짜고짜 내 어깨를 내리치던 그 몽둥이의 통증이 다시 가슴을 때렸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이원준. 너는 스쳐 지나는 사람이다. 저들을 다시 볼 일은 없다. 우연은 이걸로 끝인 거다.
갑자기 목울대로 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가슴뼈 한쪽이 무너지는 것처럼 저려왔다.
닷새간의 일정을 접고 출발한 것은 새벽녁이었다. 오후부터 근무 들어가야 할 팀이 있었다.
전날 저녁 잠깐 그었던 비는 다시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엑스레이 간찰기를 엠뷸런스에 싣고 준비실팀이 그동안 정리한 물품과 기록들을 챙겨넣고, 일행을 이끌었던 진료부장이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기회가 닿은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여름 휴가를 이리 험악하게들 보내시고 어쩝니까"
서운하고 고마운 인사가 이어졌다. 동네 꼬마들과 그새 정이 든 간호사들이 떨어지지 않는 손을 만져가며 눈물을 보였다.
다시 올 일이 있을까. 기약 없는 인사들이 오가는 동안 나는 처마가 낮은 마을 집들을 둘러보았다.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중간중간 지붕이 날아가고 축사 한쪽이 허물어진 집을 보면서 착잡하고 울적했지만 나 역시 도시로 돌아가면서 바쁜 일상 속에서 다시 떠올리기도 어려울 터였다.
도로 중간이 패이고 함부로 물길이 바뀌어진 산허리는 차가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물살이 거세게 흘러가는 계곡으로 어린 나무들이 허리를 꺾고 떨어졌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지리산 자락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지리산은 속절없이 속울음이 깊은 시퍼런 녹음이었다.
차가 쌍계사 근처를 막 지날 때였다.
낮은 산모롱이를 막 돌자마자 보라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꽃밭이었다.
도라지였다.
허리춤까지 올라온 꽃대궁들은 빗줄기에 따라 살며시 흔들리다 불어온 바람결에 후두둑 어깨를 흔들며 빗방울을 털어내었다.
누가 키우는 걸까. 농부는 보이지 않고 텅 빈 산 밭.빗속에서 허리가 가는 꽃들이 이따금 고개를 들고 웃었다.
함초롬히 빗물을 머금고 온통 초록으로 지쳐가던 산자락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꿈을 꾼 것일까. 나는 그 보라색 별빛을 보다, 작년 이른 봄에 만났던 그 모습, 그 웃음을 떠올렸다. 먹먹하게 가슴이 젖어들었다. 줄창 내리는 비는 내 안으로 물길을 낼 모양이었다.
나는 창을 조금 열었다. 빗방울 몇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얼굴로 뛰어들었다.
차가 산자락을 다 벗어날때까지 나는 꼼짝을 하지 않고 도라지 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김이 서렸던 창이 내가 문을 열어두면서 조금씩 걷혔다. 피곤에 지친 동료들은 달콤한 잠에 빠져든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