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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붕대를 감은 자화상- 반 고흐

by 소금눈물 2011. 11. 3.

 

 

발작 이후, 테오에게
- 생 레미 요양원에서


오후에 발작, 지금은 밤비가 내리고 있다
간호사들은 대체로 친절하지만
캔버스를 자꾸만 치운다 팔레트와 물감도
훔쳐간다 도대체
그림 그리는 일 말고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튜브를 먹으면서 빨간색 물감만
집요하게 빨았다 입술에 묻은 물감들은
피처럼 내장으로 번지고
내 영혼이 측백나무처럼 통째로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저 나무의 뿌리라든가
보이지 않는 물관을 팽팽하게 부풀려주는 일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떠오르고 싶은 자 떠오르게 하라
죽음으로도 별에 닿을 수 없다면
내 영혼에 구멍을 내어주마
구멍 틈새로 별빛이 빛날 테고 너는 놀라서
이곳으로 달려오겠지만,
침대 밑에서 자고 싶은 자 침대 밑에서
자게 하라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벌레처럼
침대 밑을 기어다니더라도 그것은, 테오야
낮은 곳을 그리기 위해 내 영혼을 대어보는 거란다
누군가 나를 독살하려 하고 있어
새벽에 몰래 그림 그리는 데 빗방울 사이
권총이 쇠창살로 들어오고 있었어 창문 틈으로
소용돌이치는 측백나무의 흔들림이 들린다
저 나무도 나처럼 발작,
하고 싶은 거겠지만
나도 안다 이 비 그치고 난 후에 맺혀 있을
이파리마다 맑은 물방울들.
캔버스 안에서, 낯선 사내가 나를 보고 있다
측백나무 속이란다, 테오야…


--박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