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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 1-1

by 소금눈물 2011. 11. 7.

03/02/2009 04:1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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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당나귀를 믿는 알렉사메노스와
(注: 알렉사메노스 - 이교도가 기독교인을 조롱하는 우화, 혹은 그런 그림)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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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스에 따르면,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죄인들은 따로 벌을 받지 않았다 한다. 단지 남들이 부활을 하는 날 함께 깨어나지 못할 뿐이었다. 존재의 상실. 그들에게는 바로 이게 가장 큰 형벌이었다. 따로 지옥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림에 지옥의 장면이 등장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죄인들은 동료 인간들과 신의 기억 속에서 그냥 사라질 뿐이다.그래서 초기의 작품에선 지옥은 물론이고 아예 죄인의 모습까지도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오텅의 작품에는 지옥의 장면이 보이지 않고, 심판받은 자를 안고 가는 저 악마들의 모습 속에 살짝 암시만 되어 있을 뿐이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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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에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는 날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즐거운 날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운 날이 이제는 모든 이에게 공포를 주는 날로 변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 디에스 이레(dies irae), 진노의 날.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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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리아와 성인을 신성시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이들은 엄연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이들을 신성시한 데에는 사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다신교를 믿는 미개한 유럽인들의 머리로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측으로서는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이들이 믿던 모신(母神,Muttergot)을 '마리아'로, 그리고 나머지 잡신들은 '성인'으로 둔갑시키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에 들어온 이 미개종교의 흔적이 어느새 정통 기독교의 입장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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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브르(macabre). 썩어가는 시체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
(묘사되는 형태는'3인의 생자와 3인의 사자', '죽음의 춤', 죽음의 승리' .
maqabir(묘지)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는 설, meqaber(산역꾼)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는 설, <구약성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외경 마카베어서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일반적으로 세 번째 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

p.10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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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브르가 유행하게 된 것은-) 아담이 지은 원죄,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죄의 댓가가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죄인은 죽는다. 거꾸로 말해서 죽은 사람은 죄인이다. 죽음은 죄의 징표고, 썩어가는 시체는 죄인의 표시다. 그리하여 썩어가는 시체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신 앞에 자기가 지은 죄를 겸허하게 고백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죽음의 춤'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여러 학설이 구구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페스트의 유행으로 본다. 넘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살아있는 현재에 대한 기쁨으로 격렬해져서 죽음이 다가올 수록 춤은 더더욱 '미친듯이' 광포해진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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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바인의 작품 속에선 사람들이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다. 그림을 보라. 그들은 자기가 속한 그곳에서 일상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죽음이 찾아왔는데도 그들은 '춤'을 추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고 있다. 그들뿐 아니다. 죽음도 역시 춤을 추지도 않고, 연주를 하지도 않는다. 죽음의 춤이 멈추면서 죽음의 음악도 울리기를 멈추었다. 이제 죽음은 아무 소리 없이, 시끄러운 음악소리도 없이 몰래 찾아온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일상생활의 한가운데로.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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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묘지 장식은 크게 지장(gisang 쉬는 자)과 프리앙(priant 기도하는 자)으로 나뉘어진다. 지장은 죽은 자가 잠을 자듯 누워있는 와상(臥像)이다. 이는 물론 중세 초기의 대부활의 그날까지 마음놓고 잠을 자는 호모 토투스라는 관념의 반영이다. 반면에 프리앙은 죽은 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입상(立像)인데, 여기에는 중세 말기의 영육 이원론이 반영되어 있다. 중세의 대부분의 무덤은 지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영육 이원론가 함께 '개인적 심판'이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중세 초기의 '행복한' 지장과 나란히 자기 영혼의 구제를 위해 필사적으로 비는 '불안한 프리앙'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중묘'란 지장에서 프리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형식으로, 윗단에는 죽은 자의 생전의 모습이 아랫단에는 뜯어 먹히는 트란지(반쯤 썩은 시체)는 썩게 될 육체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중묘에서 아랫단의 트란지는 죽은 자가 신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겸허하게 고백한다는 의미이고, 윗단의 영혼의 기도는 심판의 때에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제스처라 한다. 말하자면 이중묘는 죽은 자의 회개와 기원을 상징하는 셈이다. 혹시 이게 저 마카브르 제단화의 기원은 아닐까.

p.171


진중권. 세종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