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둑새벽
B와 헤어진 뒤,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헤어지고 얼마 뒤 전화 통화는 두 차례 했다. 10여년 전부턴, 바람결에도 그녀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되뇐다.
p.137
어젯밤 나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랫만에 그를 보았다.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자리에서 그와 만났는지는(꿈이 흔히 그러하듯) 뚜렷하지 않다.
다만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그가 F1a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가슴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시리고 차가운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갔고꿈을 깨어서도 나는 그 아리고 저린 상실감과 슬픔에 오래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것.
지나가버린 청춘, 다시 오지 않을 젊은날의 짧은 연정이었지만 '부질없다'고는 나는 아직 말할 수 없다.
* 한숨
한숨은 슬픔의 말이면서 안도의 말이고, 깨어진 사랑의 말이면서 되찾은 사랑의 말이다. 한숨의 사랑은 모순의 사랑이고, 움직이는 사랑이다.
p.193
* 보름
'만월'의동의어 '망월'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동洞 이름이기도 하다. 이때의 망월은 보름달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달맞이라는 뜻일까? '망望'을 동사로 여기면, 이 말은 '달을 바라본다', '달맞이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때의 '망월'은 '만월'이나 '보름달'의 동의어가 아니다. 어찌됐든, 이 망월은 1980년 5월항쟁의 기호이면서 5월학살의 기호다. 항쟁의 주체가 바랐던 것은 민주주의였고, 학살의 주체가 바랐던 것은 군사파시즘이었다. 그러니까 망월동의 '망월' 역시, 이시영의 '만월'처럼, 사적 사랑의 언어는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좀 더 살 만한 공동체를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망월동의 '망월' 역시 공적公的 사랑의 말이라 할 수 있을 테다.
p.196
*
1500여 년 전 주흥사周興嗣라는 중국인이 <천자문>의 들머리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얹었을 때, 그 세 번째 글자 '검을 현玄'은 전혀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거기서, 검다는 것은 깊숙하고 으늑하고 그윽하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바라본 밤하늘이 그랬을 것이다. 그들 생각에, 검다는 것은 깊이나 두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두텁고 그윽하다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하양의 투명성은 얄팍함과 경박함의 기호이기도 하다. 반면에 검정의 불투명성은 그윽함과 두터움의 기호다. 그렇다면, 그믐의 사랑, 검은 사랑을 깊고 그윽한 사랑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배려로 그득 찬, 무르익은 사랑의 말이다.
그러나 둥그런 보름달에 견줘 그믐달의 가냘픈 외양이 어떤 결핍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보름달이 가득함의 기호라면 그믐달은 기욺의 극점이다. 그믐달 아래서 우리는 혼자일 것 같다. 그믐달은 혼자됨과 쓸쓸함과 소슬함의 배경이다. 그믐의 사랑은 왠지 짝사랑이거나 슬픈 사랑일 것 같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 같다. 그믐의 사랑, 곧 검음의 사랑은 구름의 사랑이고 흐린 사랑이고 저문 사랑이다.
p.203-204
*
그믐과 초승은 아주 가깝다. 말하자면 사위어가는 그믐의 사랑은 새롭게 타오르기 시작할 초승의 사랑을 준비한다. 그믐의 사랑은 신생 직전의 사랑, 산고産苦의 사랑이다. 그런즉, 그믐의 사랑은 사랑의 원형일 것이다. 그것은 쓸쓸한 사랑이고 약한 맥박의 사랑이지만, 숨 가쁜 사랑이며 위대한 사랑이다. 삶이 그렇듯 사랑도, 기다란 슬픔과 슬픔 사이에 끼워진 짧따란 기쁨이고, 종種의 보전을 위한 기술이며, 신생을 위한 수고이므로.
p.205
고종석.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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