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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매혹 -2

by 소금눈물 2021. 3. 23.

그리스 신화는 다른 신화나 종교에 비해 신으로부터 인간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또한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상대적’ 구별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p. 188

 

 

신과 인간의 관계,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 신화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인간의 영혼 탐구를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처럼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가 더욱 강력하게 지배하는 조건에서 독자적 정신의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더 제한을 받는다. 그에 비해 그리스에서 인간의 상대적 독립성이 더 많은 여지를 갖고 있을 때 그 틈새를 뚫고 인간 정신을 향한 열망, 이성을 향한 욕구가 큰 자극을 받는다. 물론 전제는 ‘상대적’ 차이라는 점이다. 기본적으로는 신에 의한 규정이 지배적 영향력을 갖고 있으나 ‘정도’의 차이가 나타난다. ‘정도’의 차이 즉 상대적 편차는 중대한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변화의 시발점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에서 주어지기 마련이다.

 

p. 188-189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원인은 고대국가 형성의 서로 다른 양상과 조건 문제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는 대규모 국가체제를 요구받았다.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수자원을 관리 · 통제하기 위해 거대한 국가체제가 필요했다. 확대된 범위만큼 강력한 통합력이 필수였는데, 신화와 종교가 이러한 역할을 상당 부분 수행했다. 이를 위해 인간은 철저하게 신에 수직적으로 종속된 존재여야 했고, 개인적 요소를 최대한 억압해야 했다.

이에 비해 그리스는 거대한 국가 개념이 아니라, 소규모 도시국가 중심이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강이 흐르는 다른 지역과 달리 그리스 지형은 산맥과 좁은 계곡, 복잡한 해안선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정치적 통합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통의 언어와 비슷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각 부족은 개별 도시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4대 제전과 같은 행사가 열린 것도 분산된 조건에서 외부 적에 대항하기 위해 계속 혈연관계를 확인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국가로 통합되는 정도가 느슨할 수 있었고, 이 틈새에서 신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과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상대적 독립성이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p.189-190

 

 

그리스 철학에 의하면 덕은 내적인 자기 결단이어야 한다. 외적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행위여야 한다. 위 신화에는 스스로에 의한 강제가 맹아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여신은 아킬레우스에게 “만일 그대가 내 말을 따른다면”이라는 한정을 둔다. 신은 권고하는 입장이지 인간의 의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힘을 강제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도록 권한다. 자신의 말을 따라 감정을 억제했을 때 얻는 이익을 내세워 설득한다. 만약 아킬레우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적 결정에 의한 자기 억제다.

 

p.199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자연철학자들이 추구한 아르케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고 모든 것이 그것을 원점으로 하여 생성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것, 이것이 바로 실체로서 이는 언제나 불변적이고 다만 그 성질만이 변화하는데, 동시에 이것이 원소이며 만물의 원리라고도 최초의 철학자들은 말한다.”

 

p. 219

 

 

피타고라스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 철학은 물론이고 이후 서양 철학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친다. 육체에서 분리될 수 있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 영혼은 죽지 않으며 영원하다. 헤로도토스가 《피타고라스의 생애》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면, 피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혼은 죽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동물들로 옮겨간다. 게다가 일어났던 일들은 어떤 주기에 따라 언젠가 다시 일어나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혼을 지니고 태어나는 모든 것을 동족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영혼은 불멸하고 다른 종류로 전이한다는 이론을 공식 제기한 것이다.

 

p. 232

 

 

미숙하지 않은 영혼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는 우선 지식이 많음을 걸러낸다. “박식함이 오성을 키워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헤시오도스나 크세노파네스와 피타고라스도 많은 가르침을 터득했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현명한 것은 일체를 지배하는 이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풍부한 지식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는 않는다. 박식함이 아니라 일체를 지배하는 이성을 인식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 편)

 

p. 235

 

 

헤겔이 헤라클레이토스를 왜곡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철학적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시간’의 의미와 역할을 알아차린 것은 탁월한 통찰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시간은 과정의 추상적 직관이라는 점에서 최초의 감각적 실재라는 것이다. ··· 시간은 순수한 변화이며 또한 순수한 개념으로서, 절대적 대립물에서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 불은 물리적인 성질을 띤 시간으로서, 절대적인 불안이며 존속 · 존립하는 것의 절대적 해체, 다시 말하면 타자의 소멸이면서 또한 자기 자신의 소멸로서 정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p. 241

 

 

아르카익 조각은 공통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다. 여러 인물을 조합한 군상이 아닌 독립적 개별성을 지닌다. 또한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선과 동작보다는 부동자세에 가까운 경직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도식화된 질서가 지배한다.

 

p. 273

 

〈쿠로스〉는 이전의 키클라딕 양식 조각과 차이가 확연하다. 선이 중심인 부조식의 인체 표현을 넘어서 확연히 환조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앞면만이 아니라 뒷면과 옆면도 감상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움직이는 동작의 표현은 획기적 진전이다.

 

p. 274

 

 

이미 이전에도 외부의 영향은 있었을 텐데 왜 기원전 6세기 중반을 경계로 집중적으로 변했는지다. 그리스가 정신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내적 필요가 강화된 점도 다른 요소와 함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기술적 변화와 단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기술의 변화조차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욕구, 관심의 변화와 떼어놓고 파악할 수 없다. 만약 기술 자체의 변화 과정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의 기술 수준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는데도 왜 서양 중세에 이르러 사실적 묘사력이 급격히 후퇴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게 된다.

 

p. 280

 

 

피타고라스의 윤리관은 뛰어난 영웅의 자질이 아니라 대부분 개인이 지녀야 할 윤리적 덕목이 중심이다. 윤리적 덕목은 호메로스처럼 전쟁터나 모험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체화되어야 했다.

 

p. 281

 

 

호메로스 윤리관은 장대한 서사시 형식을 통해 영웅의 말과 행위를 전달한다. 윤리의 담지자는 영웅이고, 특별히 훈련된 몇몇 시인이 서사시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자연철학자가 생각하는 윤리는 각자의 깨달음과 행위 원칙으로 구체화되어야 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의 윤리관은 대중이 외우기 쉬운 짧은 경구로 나타났다.

 

p. 281-282

 

 

사려 즉 깊이 있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큰 덕을 이루는 핵심이다. 지혜가 도덕적인 말과 행동을 만든다.

 

p. 285

 

‘척도’는 말 그대로 기준이다. 자연철학자가 ‘근원’을 파악하는 데 몰두했다면 프로타고라스는 기준을 중요하게 여겼다. 만물의 변화를 인간이 어떠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접근하느냐에 주목했다. 그만큼 인간과 만물의 관계에서 인간의 주관적 요소가 강조되었다. 인간의 판단이 철학에서 가장 본질적 계기로 자리 잡는다.

 

p. 305

 

 

<사유와 매혹>

박홍순 지음, <서해문집>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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