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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매혹 -3

by 소금눈물 2021. 3. 23.

(플라톤 편)

이데아는 개별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라 그 너머의 ‘~자체’로서 표현된다.

 

p. 383

 

 

개별 사물의 특성을 결정하는 형상 즉 이데아는 본(本)이다. 이에 비해 사물은 완전한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물에 불과하다. 둘은 ‘상속’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일방적 관계다. 플라톤은 자연을 ‘감각적 사물의 세계’라 불렀다. 자연은 정신적이며 변화가 없는 이데아 세계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관념적 이론에 의하면 감각적 사물은 참된 실재인 이데아와 감각적으로는 인식되나 가상에 불과한 질료의 혼합물이다. 즉 감각적 사물은 초자연적 이데아가 이데아의 수동적 질료 속에 반영된 어두운 영상이다.

 

p. 383-384

 

 

국가 차원에서는 이성을 대표하는, 선의 이데아를 통찰할 수 있는 철학자가 지배의 배타적 권한을 갖는다. “철학자가 군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로 불리는 이들이 철학을 하지 않는 한 ··· 나라와 인류에게 있어서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생산에 참여하는 일반 시민이나 군인이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참여하는 일조차도 최고의 악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데아론과 철인통치론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관계다. 철학자에 의해 공동체가 지배될 때 비로소 올바름이 실현되고 조화가 달성된다. 그러므로 시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정은 국가에게 올바르지 못한, 조화를 깨뜨리는 주범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뿜을 뻔했다. 세상에 플라톤 선생!!)

 

p. 430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실주의는 소크라테스와도 달랐다. 소크라테스 역시 사실적 묘사를 주문했지만 미의 원형으로서 이상화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불완전하기 마련인 개체를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각 개인에게서 취한 아름다운 부분들을 모두 결합해서 전체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신체를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실은 그의 철학이 그러하듯이 개별 사물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흉한 동물이나 혐오감을 주는 시체라 하더라도 정확하게 묘사했을 때 즐거움을 준다.

 

p. 459

 

 

5~6세기를 지나며 예수와 성모의 모습에서 인간적 감정과 육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서로마와 동로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의 묘사는 자칫 예수의 신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가 초월적 · 신비적 이미지를 갖기 위해서 사실보다는 상징에 기초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의 재현이 아니라 형태를 왜곡해서라도 현실성에서 벗어나야 했다. 육체성과 물질성을 없애기 위해 점차 갈라 플라치디아 묘당의 〈목자 예수〉에서 보이는 배경을 제거하고, 〈전능한 예수〉처럼 화려한 바탕과 후광으로만 대신한다. 또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입은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게 다물고 있다. 얼굴 어디에서도 표정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임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원근법도 무시했다.

 

 

보통 중세 미술의 특징이라고 하는 단순화와 양식화의 경향, 공간적 깊이나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무시한 자의적 취급 등은 중세 초기와 중기에 걸쳐 대부분의 회화에서 집중적 ·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사실주의적 묘사와 자체 완성도는 오히려 성경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구원을 가르치기 위한 상징 요소만 중요해지면서 비례와 원근법은 부정된다. 그리스 · 로마 미술의 특징이던 신체에 대한 관심도 급격하게 사라진다. 헬레니즘 시대에 발달한, 개인의 생활과 연관된 풍속 요소를 배척하고 오직 신앙에 필요한 성경 이야기만이 자리 잡는다. 미술은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p. 586-587

 

 

고대 시대에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발상을 통해 그리스인과 그리스 문화가 문명을 대표하고 다른 종족과 문화는 야만이라고 구분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를 경계로 중세부터는 기독교를 인정하는 문명과 이교에 의한 야만이라는 새로운 이분법적 문명관이 정립되었다. 선과 악, 문명과 야만이라는 논리는 이후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서구적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학은 변화된 조건에 맞게 과거의 국가철학을 새로운 국가철학으로 변화시켰다. 알렉산더의 대제국이나 로마제국은 주로 군사력에 기초하여 거대한 국가체제를 만들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대토지 소유와 노예제도였다. 이를 통해 막대한 부와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노예제에 기초한 대토지 소유와 군사력에 의한 대제국의 확장 · 유지가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로마제국은 쇠퇴했다. 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제국의 멸망은 대토지 소유에서 소농 경영으로, 노예제에서 농노제로의 변화를 의미했다. 군사력에 의존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 대제국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한 대규모 영토와 구성원을 자본과 관료의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 관리할 수 있는 합리적 근대국가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독교라는 정신적 연결망을 무기로 국가의 규모와 통치력을 유지하려는 새로운 운영원리를 세운 것이다. 군주와 교회의 갈등은 국가와 교회, 국가철학과 신학의 갈등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체제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세력 간의 갈등이었다.

 

 

p. 610-611

 

 

(오컴은) 신학은 자연과 현실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의 문제로서만 접근해야 한다. 신앙에 요구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단지 믿음일 뿐이다. 그래서 오컴은 교회를 믿음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모임으로 보았다. 신앙과 이성의 분리 논리는 반드시 교권과 현실 권력의 분리로 나아가게 된다. 교회의 세속적 권력 요구를 비판하고,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의 분리를 주장했다. 교회의 권위도 교황이나 종교회의와 같은 권력이 아니라 오직 성서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p. 653

 

 

신을 향한 믿음과 신의 질서만을 찬양하던 중세시대에 인간을 향한 사랑의 감정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 단테의 시도는 조용한 혁명이었다. 인간의 사랑은 영혼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사랑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충동적 감정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사랑이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현존과 영원을 실현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는다. 단테는 신으로만 향하던 인식을 인간을 향한 열망으로, 내면의 천착으로 방향을 트는 데 적극적이었다.

 

p. 695

 

 

<사유와 매혹>

박홍순 지음, <서해문집>펴냄.

 

 

아주 재밌었고 흥미로운 책이었다.

사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어쩌다 입원할때만 들고 들어가서 찔끔찔끔 읽다가 이번에 아주 각잡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는데 원시공동체 사회부터 종교개혁시기까지 한 줄기로 아우르는 서양철학, 미학을 정리하며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며칠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좋았던 책이었던 듯.

지적능력을 시험하는 듯한 높이의 허들도 아니어서 접근성도 좋다.

 

우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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