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딱 3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날이 어제처럼 내 머리를 스친다.
나는 그때 딱 연희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아이였다.
하루 하루 생계가 고달픈 고학생이었고 시내를 가득 메운 최루탄 냄새보다 시원찮은 전공성적 사이에서 행여나 내가 소설을 쓰게 되면 어떤 병명으로 주인공을 죽일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며 의학용어를 욌다.
다른 학교 한 학년 위던 (지금은 둘째 새언니가 된)고향언니의 이름으로 철학책을 빌려읽던 생각도 난다.
실습용으로 산 색연필로 리포트 대신 엽서그리기에 더 골몰했던 그런 데맹생이였다.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 한복판에 휘갈겨 써 있던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가 생각난다.
대전 산업대 (지금은 이사가서 그 자리에 없지만) 높은 담장에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을 처단하라" 붉은 페인트 글귀도 뇌리에 선명하다.
젊은 목숨들이 많이도 죽었지.
무섭고 떨린 소문들, 가난한 골목길 새벽을 뛰어가던 발걸음들.
아침에 문을 열고 마당에 나가보면 간밤에 날아든 조악한 인쇄물들, 그 사진들은 정말로 불과 몇년 전 이 땅에서 자행된 일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던 참혹한 사진들이었다.
교문앞의 닭장차와 대전 시내 번화가인 은행동을 지나가지 못하는 버스들과 점심시간마다 울려펴지던 아침이슬, 불온한 소문들과 공포 사이에서 이문세와 이상은과 박종화의 다정불심을 뒤죽박죽 읽던 1학년이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피하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영화를 보며 숨이 막혔다.
몇 번이고 영화 이야기를 제대로 써 보려고 노트북을 열었다 닫았다.
밤이면 눈물이 많아 쓰질 못하고 낮에는 생각을 죽이려 노트북을 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87년을 건너고 88년을 지나서야, 그 모든 분노와 환희와 절망이 끓어터져 조금씩 허탈하게 가라앉은 다음에야 혼자 어리둥절 크고 있던 아이였다.
전대협진군식을 직장 현장에서 겪으며 시대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고, 기형도의 죽음을 신문에서 읽으며 그의 후배 이한열을 다시 떠올렸다. 박정만의 죽음을 통해 내가 무심하게, 무식하게, 무연하게 흘러보냈던 그들, 그 눈물들, 그 목숨들과 그 정의들을 늦게, 아주 늦게 조그만 목소리로 불렀다.
영화를 보다 두 군데서 그 늦은 죄책감이 저 밑바닥에서 다시 치고 올라온다.
유가족으로 부검의 현장에 서게 된 열사의 삼촌, 박월길(조우진 역)이 겁에 질려 쭈빗쭈빗 들어와 부검실을 돌아보다 차디찬 주검이 된 조카의 몸을 대하고, 그 몸에 그어지는 메스를 보며 일그러지는 그 얼굴! 소리내어 통곡하지도 못하면서 얼굴의 근육들 마디마디가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듯한 그 오열.
자랑스런 서울대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들을 하루아침에 국가권력으로부터 살해당하고 여자들처럼 울지도 못하고 넋을 잃고 보내는 아비가, 눈발이 눈을 가리는 갈대밭에 생때같은 자식의 재를 뿌리다 물텀벙에 엎어지며 비로소 터뜨리는 절규.
- 왜 가지 못하니!!
아아... 무슨 말을 더 보태랴.
이후에도 몇 번을 더 생각하며, 고쳐 마음을 다지며 이 영화를 떠올리며 글을 고를 수 있을지.
더는 쓰지 못하겠다.
그저.. 너무나 고맙다.
이런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어서.
생각없던 그 87년의 아이가 벗겨진 운동화 한짝을 멀리서 바라보며 슬그머니 도망갔던 그 골목길에 돌아와 서서 엔딩 크레딧을 보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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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심에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 자칫 주제가 너무 무거워서 답답하기만 한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꼭 일러두고 싶다.
영화 자체의 작품성은 이미ㅡ 너무나 충분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등장씬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주조연 모두들 그들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기와 연출과 카메라, 조명, 효과 모두들 더할나위없이 완벽했다.
엔딩장면은 그 중에서도 최고ㅡ 어떤 영화보다도 더 큰 울림과 감동이었다.
최고 중의 최고였다.
당신의 정치적 가치관, 그 저울의 추와 상관없이 이 영화는 훌륭하다.
1987년, 그때를 만들어준 선배들의 고난에 감사드리며, 그 시간을 겪었던 87년의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이제 30년, 그날의 완성, 오늘 젊은 후배들에게 권한다.
그 날의 선배들, 동지들, 시민이었던 우리 모두에게 2017년 이 영화를 헌정한다.
그 뜨거운 인사로 받을 만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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