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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폴란드- 천년의 미술 전>- 국립 중앙박물관

by 소금눈물 2015. 8. 21.

 

 

이 전시회를 보기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소비에트  연방 중의 하나였던가 (연식이 나온다 -_-;), 여행이 쉽지 않았던 동유럽,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나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러시아에는 그 어마무지한 에르미타쥬미술관도 있고 러시아제국이 이룩했던 찬란한 문화를 이래저래 엿보고 접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그리 낯설지는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이 많이 있기도 하구요.

 

 

 

 

애초에 이번 휴가 테마를 그림으로 잡고 나서 맨 먼저 찍은 것이 이 전시회였습니다.

그런데 당일, 아침 한가람 모딜리아니를 보고 나서 점심을 먹고 서둘러 달려간 중앙 박물관, 어마무지한 인파로 어질어질하다는 현장 대기팀의 전언 ㅠㅠ

갈까 말까 망설이다, 그래 이 기회 아니면 또 어떻게 '폴란드'미술을 보겠냐고 각오하고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이렇게 대규모로 소개되는 폴란드 미술은 처음이었지 싶어요.

 

역시나 엄청나게 많은 인파로 고생은 했지만, 정말 눈을 황홀하게,가슴을 시리게 만든 엄청난 전시회였습니다.

 

다른 전시회들과 다르게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초반에는 감탄만 하다가 (눈으로 가슴으로 보는 것이 물론 가장 좋은 관람법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알고 회화는 후레쉬를 터뜨리지 않고 찍었습니다. 물론 실내이고 어둡다보니 화질은 몹시 빙구입니다. 전시회장 안에서 사진촬영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요.

 

사실, 이 전시회에서 가장 압도되고 감동했던 테마는 맨 처음 도입부입니다.

이 전시실 분위기를 다른 분 블로그에서 업어와 보았습니다. 한번 보세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yjayblues&logNo=220405914880

 

아마도 폴란드는 재질이 좋은 목재가 나는 나라였을 것 같지요?
수백 년을 견뎌 온 성상들의 상태와 색감이 아주 좋습니다. 수없이 전화를 견디고도 살아남은  성상들은 그 땅의 고통과 기원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했던, 서유럽의 성상들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지요?

섬세한 표현력, 꼼꼼하고 사실적인 인물들의 움직임, 그윽하고 절제된 표정이 아니라 희노애락의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보이는 성인들과 천사들. 폴란드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그 고요하고 절대적인 침묵의 슬픔이 아니라 좀 더 직접적인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神의 아들이기 이전에, 가난한 수행자, 외로웠던 청년의 육신, 그 몸을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흠도 없이 완벽한 신의 모습으로 성인들이 그려지지 않고, '그랬을 법한', '그 시대 어느 마을에 꼭 있었을 것 같은' 얼굴로 주교님이 새겨지고, 사십일간의 고행 속에서 지치고 병든 수행자로 예수는 서 있습니다. 마리아는 초라한 나사렛 여인의 얼굴입니다.

같은 종교이면서 동유럽과 서유럽의 성상이 이렇게 다른 얼굴과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군요.

이런 성상을 본 것은 처음이라 충격을 받으면서도 가슴에 확 들어오는 감동을 줍니다.

동유럽처럼, 그리스정교가 아닐까 했는데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긍을 드러내는 기록화들도 참 좋았고

 

 

 

 

아름다운 왕비와 왕의 슬픈 사랑(빌뉴스의 라지비우 궁정에서 지그문트 아우크스트2세 왕과 바라바라 라지비우 왕비)은 화가들의 오랜 사랑을 받은 주제였다고 하니 로맨틱한 영화를 보는 느낌도 나구요.

 

 

 

 

 

이 전시회의 얼굴이었던 <워비치의 소녀> 아폴로니우 켄지에르스키라는 작가의 그림입니다.

물론 저는 처음 들어보는 화가입니다.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 소녀>를 보는 듯한, 맑고 신비스러운 눈동자입니다.

 

 

 

 

그림설명을 보니 19세기 폴란드의 부유한 계층에서는 사냥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고 하네요.

눈이 이렇게나 쌓인 겨울 숲에서 사냥감을 쫓는 남자들의 거친 호흡과 열기가 절로 느껴집니다.

 

 

 

 

<부채를 든 여인>이라는 이 작품은 낯이 익습니다.

갖고 있는 <세계미술사의 아름다운 여인들 100> 화집에서 본 것 같네요.

오! 폴란드 여인이었군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꽃>

프랑스 로코코미술의 꽃이었던 부셰의 여인들보다 더 아름답고 기품있는 여인 초상화입니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

넋을 잃고 반해서 한참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많은 남녀들의 한숨과 질투와 눈먼 사랑을 받았을까.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브와디스와프 차후르스키라는 작가가 그린 그림이랍니다.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치프리안 고뎁스키의 조각 <유혹>입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움츠리고 한사코 피하려는 젊은 여인을 끌어안고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티로스.

조각인데도 인물들의 감정이 아주 선연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얼굴, 아침저녁으로 날마다 뉴스로 접하면서 절로 혐오감이 치솟네요.

아 진짜 발정난 짐승들도 아니고, 뭔 지위고하, 직업의 분별도 없이... 추악합니다 정말.

 

 

 

 

비단 드레스의 반짝이는 재질과 기품있는 귀부인의 얼굴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누드. 대작입니다.

목욕을 하고 물가에 잠이 든 여인의 모습은 아프로디테의 몸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군요. 관람자가 편안히 훔쳐볼 수 있도록 시선을 돌려준 매너까지 ㅎㅎ;

 

보이지에르 게르손이라는 작가가 그린 이 <휴식/ 목욕 후>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랍니다.

 

 

 

 

예수의 모습이, 구스타브 쿠르베의 <안녕하시오 쿠르베씨>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화라 하더라도 서유럽의 성화나 비잔틴의 성화들과는 아주 분위기가 다릅니다.

 

 

 

 

아 이 그림은 알겠습니다.

야체크 말체프스키의 <죽음>입니다.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에서 보았던 도상입니다.

서양화에서 낫을 든 여인,혹은 남자는 타나토스를 상징합니다.

모든 시간을 잘라내 무화로 돌아가는  크로노스이기도 합니다.

 

표정이 없는 차가운 얼굴의 죽음 앞에서 그러나 이 여신을 오래 기다려 온 노인은 두 손을 가만히 모으고 눈을 감습니다.

고단한 인생을 다 걸어와 이제 긴 여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노인은 오히려 평안을 얻는 걸까요.

노인의 눈을 가려주는 죽음의 신은 그래서 자애롭게까지 보입니다.

모든 것은 이제 끝났습니다. 아무도 더 이상 이 노인을 슬프게도, 고통스럽게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그림 앞에서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의 사신을 떠올렸습니다.

죽음은 아마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괜찮은, 적어도 나쁘지는 않는 일일 것도 같습니다.

 

 

 

 

 

 

 

 

 

 

 

 

낯설고도 아름다운 폴란드 미술을 돌아보고 나니 이 전시회를 보지 못하고 내려갔으면 어쨌을까 한숨이 나왔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어요.

 

너무 많은 인파속에서 꼼꼼하게 들여다보지도 못했고, 도록을 사지도 못해서 섭섭하고 아쉬운데다 어두운 전시장에서 손전화로 찍은 그림들의 질이 이 모양이라 참.. 할 말이 없네요 ㅜㅜ

 

더 아쉬운 것 중 하나는, 이왕 이렇게 큰 전시를 잡았으니 아트샵에서도 폴란드 미술을 가까이 접하고 기념할 수 있게 기념품들이 좀 많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콘텐츠도 다양하지 않았고 미술작품들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급조한 티가 역력한 아트샵의 문화상품들이 ... 저 아름다운 그림들이나 조각들을 마우스패드나 마그넷, 달력, 기념노트 등으로 다양하게 내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래도... 정말 정말 좋았던 전시였습니다.

특히나 도입부, 사진으로는 한 장도 찍지 못했지만, 목조조각에서 압도당한 감동은 아주 오래 갈 것 같습니다.